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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3년 12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이달의 순국선열 다. 이어서 『대조선독립협회회보』라는 반월 간 잡지를 1896년 12월에 간행했는데, 구국 사상의 일환으로 물리·화학·기술·실업 등의 실용적인 내용을 담은 잡지로 지령 제18호로 종간되었다. 남궁억은 독립협회 활동 때 토론회에 참여 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말부터 토론 회를 개최했는데, 주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서 이슈가 되었던 것들로 토론 과정에서 그 를 비롯한 소장 위원들이 국가의 정치 문제 에 대해 비판을 더하면서 고위관료들과 의견 대립이 생겼다. 당시 남궁억은 35세의 소장 신진파로서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 다. 1898년 2월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 최하고 소장신진파를 중심으로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부회장이던 이완용이 회장, 윤치호가 부회장, 이상재와 윤호정이 회계를 맡았는데, 이때 서기가 되었다. 『황성신문』 창간, 러일협정 부당성 게재로 3개월 동안 구금돼 『독립신문』을 통해 언론의 힘을 경험한 남 궁억은 1898년 9월 주식회사로서 황성신문 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 매일신문인 『황 성신문』을 창간하였다. 1898년 9월 5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한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 으로 지식층 독자를 확보했다. 필진으로는 당 시 한학과 유학의 조예가 깊었던 장지연·유 근·박은식·신채호·남궁훈 등이 참여하였다. 1902년 러일협정 의정서의 부당함과 일제 의 간계를 폭로한 기사를 『황성신문』에 게재 하여 총무 나수연과 함께 구속되고 경무청에 구금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경무 청 감방 앞에서 17살 아들 남궁염이 아버지 의 석방을 요구하며 14일을 단식투쟁하였다. 평리원의 심사를 마친 후 8월 8일 석방되었 고, 총무 나수연은 9월 11일 석방되었다. 1903년 3월 황성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 난 후 1905년 3월 성주목사(聖州牧使), 1906 년 1월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지방관 리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양양군수 시절 동헌 뒷산에 중등학교 정도의 현산학교 를 설립하여 순수 민간차원에서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현재 양양초등학교 의 전신인 현산(峴山)학교는 1906년 9월 8일 개교식을 거행했으며,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세워져 강원도 근대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 년 8개월을 양양군수로 재직하며 고을을 다 스리다가 1907년 9월 사임하였다. 대한협회 회장으로 구국계몽과 실력배양에 노력 1907년 11월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1908 년 2월 8일 제4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 되어 그해 12월까지 재임하였다. 대한협회 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8년 4월 25일 『대한협회회보』를 발간하였다. 두 차례 논설 을 실었는데, 제2호(1908.5.25)에는 「사상과 능력의 상수(相須)」를, 제3호(1908. 6. 25)에 는 「사회조화」란 글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