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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남궁억(南宮檍) 선생 49 를 배운 지 1년도 안되어 회화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때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년 6월 동문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886년 내아문(內衙門) 부주사 (副主事)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통역 관이자 임금의 어전통역관으로 고종을 알 현하였다. 1887년 조민희를 유럽 5개국 전 권대신으로 임명하여 파견할 때 통역서기 관으로 동행하였다. 1893년 4월 경상도 칠 곡부사에 임명되어 청렴하게 근무하며 선 정을 베풀었다. 1895년 2월 칠곡부사를 사 임하고 궁내부 토목국장에 임명되었다. 토 목국장 재임 시 한성의 종로통과 정동 일대 및 육조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 정비 하고, 근대식 탑골공원을 건립하였다. 그리 고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백성들에게 망 건 대신 단발을 적극 권장하였다. 토목국장 당시 낮에는 관직에 충실했다. 밤에는 흥화 학교(興化學校) 교사로 영문법과 한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외국어와 선진기술 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을미사변 이후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 편집 발행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참살 당하자(을미사변)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부 터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독립협회 의 시작은 서재필이, 협회장은 안경수, 이완용 에 이어 윤치호가 맡았으며, 실질적인 살림살 이를 책임졌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 을 발간하였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발 행하는 한 페이지짜리 신문이었으나 곧 세 번 으로 늘어났다. 한글판과 영문판 두 종류를 발간했는데, 한글판은 주시경이, 영문판은 그 가 편집하였고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기사를 모았다. 배재학당 삼문인쇄소에서 인쇄했다. 그러나 영문판은 발행한 지 채 1년을 채 우지 못하고 1896년 12월 31일에 종간되었 『독립신문』 창간호(독립기념관 제공) 독립협회에서 세운 독립문과 독립관 전경(1898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