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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임시정부 외교 선봉장 조소앙의 1940년대 전시외교 활동 41 기자들을 간담 회 형 식 으 로 초청하여, 한 국 대표가 참 가할 수 있도 록 도와주기를 호소하였다. 조소앙은 국 무회의의 결의 에 따라, 「 각국 원수(元首)에게 주석(主席)으로 공전(公電)하 는 초고(草稿) 」 · 「 각국 대표에게 외장(外長, 외무부장 을 가리킴)이 공전한 초고」 등을 신속하게 작성하였 다. 또 임시정부 외무부장 명의로 중 · 미 · 영 · 불(佛) · 소 의 외교 수장들에게 「 샌프란시스코 회의 참가 요청 공함 」 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조소앙은 동양평화 와 한국독립을 완성하는 임시정부의 의견과 요구를 제시한 「 연합국회의에 보내는 한국임시정부의 비망 록 」 을 비롯해,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제출할 문건들 도 직접 작성하였다. 임시정부는 1945년 3월 8일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재미(在美) 인사에 단장 이승만을 포 함해 9인을 선임했고, 3월 23일에는 원동(遠東) 대표 로 외무부장 조소앙과 부주석 김규식을 각각 임명했 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등 미주(美洲)지역 대표들 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나, 5월 19일 한국 대표 는 회의 참가를 최종 거부당하였다. 원동 대표 조소앙도 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중 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고, 중칭 주재 미국대사 관 에게 비자 발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미국대사관은 비자 발급을 계속 지연시키면서 본국 정부의 지시 만 기다렸고, 한국 대표단의 대회 참석은 결국 무산 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회의가 후반으로 접어든 이 해 6월까지도, 조소앙은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려 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미국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은 한국민 의 절박한 호소를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8 · 15해방 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정책은 해방정국 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한국현대사에 큰 아쉬움 을 남겼다. 1945년 11월 3일 귀국 출발 전에 중 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요인들 과 기념촬영한 조소앙(두번째줄 가운 데, 중앙일보 제공) 1945년 4월 말 샌프란시코회의(유엔창설회의)가 열린 샌프란시 스코 오페라하우스(조선일보 제공) 필자 김인식 중앙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 앙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 학술이사 및 한국 민족운동사학회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안재홍의 신국가건설운동』,  『광복 전후 국가건설론』, 『대한민국정부수립』, 『애산 이인 평전』, 『조소앙 평전』,  『이승복과 신간회운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