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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임시정부 외교 선봉장 조소앙의 1940년대 전시외교 활동 39 임시정부는 1941년 들어 여러 경로를 통해 대미 외교를 본격화하였다. 조소앙은 1941년 6월 6일 미 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서신을 보내어, 임시정부 가 지금까지 중국과 협력하여 항일투쟁 전선에서 공 동으로 노력하여 왔음을 상기시키면서 경제 · 군사상 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날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 로 임명하는 신임장을 미국정부에 발송하였다. 조소앙은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 국무장관 헐에게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 lease)에 따라 임시정부에 도 무기를 대여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정 부는 1942년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을 거의 확정한 상태였으므로, 임시정부 승인은 물론 원조 요구조차 모두 거부하였다. 이러한 불승 인 정책의 근본 이유는, 임시정부 승인이 전후 한국 문제의 해결책으로 구상하는 국제신탁통치안과 어 긋난다는 점에 있었다. 국제공관안(共管案)을 반대하는 논리를 주도하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1942년 들어 이미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기울었고, 1943년에는 표면화하 기 시작했다. 1942년 4월과 7월 미국 잡지가, 전후 한국에 신탁통치가 실시되리라고 보도한 뒤, 1943 년 4월 미국과 영국의 언론에 신탁통치안이 다시 등 장하였다. 이에 조소앙은 한국인들의 주장을 논리화하여, 신 탁통치를 거부하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임시정 부 차원의 첫 공식 성명은 1943년 2월 1일 ‘한국외무 부장 조소앙’ 명의로 공표되었다. 조소앙은 ‘신탁통 치’ 대신에 ‘국제공영’ · ‘국제공관’(國際共管, 국제공동 관리) · ‘위임통치’ · ‘국제적 지배’ · ‘후견제’라는 표현 을 사용했는데, ‘국제공관’이 강행되면 ‘혈전’으로 ‘저항’ 하겠다는 한국민의 의사를 대변하였다. 임시정부는 ‘국제공관안’을 반대하는 한국인의 집단의지를 표출 하기 위해, 충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하여 1943년 5월 10일 재중국자유한인대회(在 中國自由韓人大會)를 개최했다. 이 때 조소앙 등이 연 사로 나와 열변을 토하였다. 임시정부가 국제공관안에 반대하는 여론을 확 산시키던 1943년 6월, 루즈벨트가 중국 국민정부 의 최고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에게 미 · 중 수뇌 회담 을 제안하였다. 이 회담은 이후 조율 과정을 거쳐 카 이로회담으로 최종 일정이 확정되었다. 임시정부는 미 · 중 수뇌 회담이 한국독립을 보장받고 국제공관안 을 철회시킬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여, 장제스와 면 담을 추진하였고 7월 26일 성사되었다. 이 자리에는 임시정부 측에서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등 5인이 참석하였다. 김구와 조소앙은 장제 스에게,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영국과 미국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여 관철시켜 주기를 요청했다. 장제스는 “중 국도 역쟁(力爭)”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카이로선언」, 보장된 독립과 굴절된 해방의 양면성 장제스가 노력한 끝에, 이집트 카이로에서 3국의 정상들은 한국의 독립 문제도 의제에 올렸다. 1943 년 12월 1일 공포된 「카이로선언」은 미 · 영 · 중 3국이 대일전에 협력하고, 일본이 패전할 경우 일본이 탈 취한 영토를 처리하는 문제 등을 규정한 뒤 한국의 독립 문제에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