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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12월 Special Theme   카이로선언 80주년 특집 해외 독립운동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약 충칭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은, 전시체제에서 대일 전을 수행하는 ‘정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여 대내외 에 확립하는 데 주력(注力)하였다. 조소앙은 충칭시 기 이전부터 임시정부의 외교 방향을 명확하게 설정 했다. 그가 작성하여 임시정부 국무회의와 임시의정 원에서 의결 · 통과(1939년 11월 11일과 12일)된 「 독 립운동방략 」 은, “중국을 위시하여 각 우방에 대하여 우리 임시정부의 법적 승인을 요구하며 아울러 각종 의 원조를 청할 것”을 외교 방략으로 천명하였다. 결 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방향은 임시정부가 국제법상 의 승인을 확보하는 목표까지 달성하지는 못했더라 도, 중국을 통해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 카이 로선언 」 을 도출하였다는 데에서 일정하게 성공했다 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반(反)파시즘 연합국의 일원임을 선언 하다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얻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도 임시정부가 교전단체로 대일전에 참 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먼저 인정받아야 했 다. 1941년 8월 14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영국 수 상 처칠이 합의하여 「 대서양헌장(大西洋憲章)」 을 발 표하자, 조소앙은 임시정부 명의로 루즈벨트 · 처칠의 공동선언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 서는 미국 · 영국 양국에 임시정부 승인과 군비(軍備) 원조를 요구하면서 연합국의 공동전선에 참가한다 고 표명함으로써, 임시정부가 반파시즘 연합국의 일 원임을 선언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제가 진주만을 급습하자, 미 국이 본격 참전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은 태평양전 쟁으로 확전되었다. 임시정부도 조소앙이 작성한 「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를 12월 10일 발표하고, 미 · 소 · 영 · 중 4개국에 발송했다. 주석 김구 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공포한 이 성명서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는 하나의 ‘전투단위’임을 선언하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血戰)”하겠다는 의지를 국제사회 에 선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1941.12.10)(연합뉴스 제공) 위싱턴 주미외교위원부 협찬회 참가자들(1944.5.28., 한국학중 앙연구원 제공). 뒷줄에 이승만 위원장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