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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김구, 장제스(蔣介石)와 카이로회담 35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곧이어 김원봉,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이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에 더하 여 임시정부 측의 신탁 반대 총파업 등 강경론에 반 대하여 송진우, 김규식, 안재홍을 비롯한 중도적 우 익 세력 또한 찬성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자 김구 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기 에 이르렀다. 귀국 직후 그런대로 유지되던 미군정 과의 관계도 반탁운동을 계기로 하여 점차 악화되어 임시정부 요인들의 정치적 기반은 상당히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1947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건과 신탁통치의 실시 방안이 다시 제기되자 김구를 중심 으로 하는 임시정부 측에서는 신탁통치와 남북 단독 정부 수립에 전면 반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국내적 국제적 지지 기반을 크게 잃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임시정부 측의 이러한 대응을 보면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국민정부 측의 입장은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 환국 직후 김구에 대한 지 원 방안을 여러모로 모색하고 있던 국민정부 측에서 는, 기본적으로 신탁통치 방안에 동의하는 입장을 가 지고 있었던 때문에 김구에게 신탁 반대에 대하여 신 중할 것과 미군정 측과의 협력도 유지하도록 요구하 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곤혹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한국 내 지지 기반에 있어서 나 미군정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가고 있던 이승 만을 지지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47년 4 월 미국 방문 뒤 귀국길에 난징(南京)에 들린 이승만 을 만난 뒤, 장제스는 이승만 지지를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도록 외교당국에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단독정부 설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나섰던 김구 는 1949년 6월,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출신으로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이 소 식을 접한 장제스 국민정부 측에서는 중국 내 언론 보도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이 사건이 이승만 이나 미국의 배후설로 연결 보도되지 않도록 해달라 고 주의를 당부했다. 새로 택한 파트너인 이승만에 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 국민정부의 분명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입장은 어디까지 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 유지에 있었지 김구 지지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 던 것이다. 80년 전 카이로에서 미국 측이 주장하고 중국 측 이 동의했던 신탁통치 방안은, 결과적으로 남북 분 단으로 이어졌고 열전(한국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 치며 오늘날까지 한국현대사를 짓누르는 결정적 요 인이 되고 있다. 신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중 간 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앞날을 생 각할 때 카이로회담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교훈을 준다. 서울대학교에서 중국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부산대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 한일역 사가회의 한국측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장개석연구: 국민 혁명시기 군사정치적 대두과정』, 『쑨원과 한국: 중화주의와 사대주의의 교차』,  『왕징웨이연구: 중국현대민족주의의 굴절』, 『중국과 아시아: 근현대 중국의 아 시아 인식과 아시아주의』 등이 있고, 현재 『20세기 한중관계사』를 출판 준비 중 이다.  필자 배경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