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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김구, 장제스(蔣介石)와 카이로회담 31 카이로회담은 1910년 일제의 식민지 로 전락한 한국의 독립을 국제회의에 서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 서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 를 갖고 있다. 카이로회담은 지금부 터 꼭 80년 전인 1943년 11월 말 이 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열렸다. 중 국 총통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루즈벨 트와 회담하면서 한국에 대한 ‘즉각 적인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제 스의 이런 입장 표명이 김구 등 한국  측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는 아니었 다. 이 때 카이로에서 미국 측이 주장 하고 중국 측이 동의했던 신탁통치  방안은, 결과적으로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열전(한국전쟁)과 냉전 시 대를 거치며 오늘날까지 한국현대사 를 짓누르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 다. ‘신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미 · 중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앞날을 생각할 때 카이로회담 의 역사는 여전히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카이로회담의 개최와 한국독립 문제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독립을, 국제회의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카이로회담은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중 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카이로회담은 지금부터 꼭 80년 전인 1943 년 11월 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열렸다. 이 회의를 제안한 사람 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였다. 루즈벨트는 제 이차대전의 종전이 예견되던 1943년 중반에 최종승리를 위한 연합국 간의 군사협력과 전후 세계질서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영국, 소련에 회담 참석을 요청하였고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모색을 위해 중국 에게도 참석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채 유럽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던 까닭에 일본과의 전면전을 치르 고 있던 중국과 함께 하는 회담에 참여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먼저 11월말 카이로에서 미·영·중 삼국회담을 열고 그 결과를 가 지고 12월 초 테헤란에서 미·영·소 삼국회담을 열기로 정해졌다. 카이로회담의 의제는 이차대전에서의 조속한 승리를 위한 군사 협력 에 초점이 있었지만 전후 세계질서의 안정적 설계 문제 또한 중요한 의 제였다. 그 가운데 패전국이 될 추축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들어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 일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쑹메이링[宋美齡](앞줄 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