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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유럽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관 황기환 27 해 결정될 것”이라고 예견했다(Sunday Mirror, 1920.4.25., “WILL THE WHITE MAN LOSE ASIA?”). 멕켄지의 신간 발 간으로 일본의 아시아-시베리아 지배 문제, 한국에 대한 학살과 탄압, 이에 저 항하는 한국인들의 투쟁이 큰 관심을 불 러일으켰다. 1920년 10월 3일 런던에 도착한 황 기환은 각 신문사들과 활발하게 인터뷰 하며 자신의 인생과 한국의 독립운동, 영일관계에 대한 전망 등을 적극적으 로 설명했다. 영국 언론은 “방금 런던에 한국사절단[korean mission]」의 E. K. whang(황기환)이라는 흥미로운 방문 자가 왔음”을 알리며 그가 프랑스에서 미군으로 싸웠던 일이나, 일본 통치하 에 있는 조국의 비참함을 영국인에게 알 리기 위해 왔음을 전했다(Birmingham Daily Gazette, 1920.10.19., “KOREA”). 황기환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 을 접한 신문은 “한국의 혁명가들이 이 제 이곳 런던에 본부를 세우고 있다. 런 던은 세계의 선전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 다”고 강조하기도 했다(Sunday Mirror, 1920.10.17, “World’s Propaganda Centre”). 이는 런던에서 이뤄진 황기환 의 언론 선전이 그 개인이 아닌 한국독립운동의 일환 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0년 10월 26일 영국 하원의사당에서 한국친우 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한국 친우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황기환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때 황 기환 은 영국 인사들과의 만남에 대해 “각계에서는 영·일 동맹이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이를 단절시켜야 한다 고 생각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정의와 자유에 대 파리위원부 직원들. 둘째줄 맨 오른쪽이 황기환이다. 『자유한국』의 편집진. 가운데 태극기  앞 인물이 황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