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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23년 12월 Special Theme   카이로선언 80주년 특집 해외 독립운동과 한국독립운동가들의 활약 영국의 식민지에서 민감한 선동행위를 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불만을 갖게 되었다. 한편 1919년 3 · 1운동 을 목도한 서울주재 대리 총영사 로이즈(William M. Royds)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 전반과 시위진압 방법을 비판하는 의견을 본국에 보내는 등 일본에 대 한 비판적 인식이 고조되어 갔다. 비록 한국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영국 외무성의 기조가 원천적 으로 변하진 않았지만, 일본군에 의한 학살사건이 런 던에 전해지자 일본에 대한 인식은 악화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지 엘. 쇼(George L. Shaw)가 일본 에 의해 체포되는 ‘쇼오(Shaw) 사건’이 일어나면서 영 국 상인들의 분노가 치솟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애국 헌금을 열심히 하며 영국 상인사회에서 존경 을 받고 있던 상하이(上海) 상공회의소 회원 쇼의 체 포는 영국인의 경제적 이권에 대한 일본의 간섭 과 침 해로 받아들여졌다. 1920년 10월 황기환의 런던 파 견은 이렇듯 미묘한 영일관계 상황에서 이뤄졌다. 황기환의 런던 활동과 한국친우회의 결성 1920년 구미위원부의 런던사무소 개설이 구체 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멕켄지 (Mckenzie, F. A)의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 s Fight for Freedom), 이하 ‘한국의 투쟁’』의 출판 이었다. 1920년 4월 멕켄지는 ‘한국의 투쟁’을 발간 하며 “백인은 아시아를 잃을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 졌다. 그는 “급속도로 커져가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 는 아시아에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아마겟돈에 의 유럽지역 외교활동을 주도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건물 (필자 촬영) 1920년 10월 『자유한국』 6호에 실린 황기환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