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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유럽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관 황기환 25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파리에 서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미국 · 영 국 · 프랑스 등 강대국들에 의해 좌 우되어 소위 약소민족들에게 실망 만을 안겨줬다. 그러나 파리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열강간 의 미묘한 긴장관계와 자유 억압 에 대한 성찰의 공간을 파악하고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리고 그 활동 거점을 파리에서 런 던으로 확장하며 한국독립을 지지 하는 후원조직을 만들어냈다. 이  때 유럽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 고,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한국친 우회를 조직하는데 빠짐없이 역할 을 한 이가 바로 황기환이었다. 이 러한 초기 외교활동과 한민족의 독 립운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 정부는 1940년대 전반기 나름의  외교 활동을 펼쳐 카이로선언에서  미 · 영 · 중의 한국독립 약속을 이끌 어낼 수 있었다. 황기환의 미국 망명과 초기 유럽 활동 황기환(黃己煥)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03년 한성 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에서 수학한 그는 1904년 3월 28일 여객선 갤 릭(Gaelic)호를 타고 일본 고베(神戶)를 출발하여 4월 10일 하와이 호놀 룰루에 도착하였다. 미국 본토에 상륙한 황기환은 캘리포니아 레드랜드 (Redlands, 紫地)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그는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 입하며 한인사회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 하기는 어렵지만, 1918년 입대 직전까지 시카고에 거주한 것으로 파악 된다. 1918년 5월 18일 미군에 입대한 황기환은 7월 15일 뉴욕을 떠나 유럽 전선에 배치되었다. 1년여 간의 군 생활을 마친 그는 1919년 6월 3일 독일에서 파리로 이동하여 파리에서 활동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대표부에 합류하였다. 1919년 중반 파리의 한국대표부는 구미위원부의 산하조직으로 활동 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8월초 위원장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고, 부 위원장 이관용도 만국사회당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를 떠나면서 서기장 황기환이 사실상 거의 모든 활동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황기환은 유 럽지역 활동을 위해 파리에 온 독립운동가들과 소통하고,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 유럽 지역 한국인의 보호와 편의 제공을 담당하였다. 파리의 한국대표부(이하 파리위원부)는 무엇보다 유럽에서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통신국’의 이름으 로 「 통신전(通信箋, Cirulaire) 」 을 발표하고, 1920년 5월부터 『자유한국 (La Corée Libre)』을 발행하였다. 특히 『자유한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駐)파리위원부 통신국에서 프랑스어로 발행한 월간잡지로 국제 정세 와 한국 독립운동을 주로 다루었다. 파리를 거점으로 런던을 오가던 황 기환은 『자유한국』의 ‘편집자’로서 역할하였다.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 하고 있던 파리위원부는 기존에 일본이 구미 국가와 맺고 있는 전통적 인 우호관계에 미묘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간파했다. 특히 일본에 대해 미묘하게 인식이 변화하는 영국을 주목하였다. 1919년 영국은 식민지에서 당면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식민지 통치국들간 공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지만, 일본이 인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