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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서울, 독립운동과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④ 107 서 나온 시위대가 결집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한 후 대오를 나누어 행진하였다. 이어 3월 3일 밤에 는 세브란스병원 직원 정태영이 보신각종을 타종하여 독립운동 을 촉구하였다. 3월 12일에는 서 린동에 모인 문일평, 김백원 등이 민족대표 33인의 뒤를 잇자는 취 지의 13도대표자회의를 개최한 후 13명이 서명한 ‘애원서’를 낭독 한 곳도 이곳이었다. 보신각 아래 ‘3·1독립운동기념터’ 표석에 씌어 있듯이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서 13도대표자회의를 소집했던 홍진, 이규갑, 김사국 등이 4·23국 민대회를 개최하여 유인물로나마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도 이곳이 었다. 보신각 맞은편에 있는 YMCA 회관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박희도가 간사로 있으면서 김원벽, 강기덕 등 학생 대표들과 소통하는 등 3·1운동을 준비한 곳 중 하나이다. YMCA회 관은 조선청년총동맹, 근우회 등 주요 사회단체의 결성식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YMCA회관 옆에는 1923년 김 상옥 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종로 경찰서도 있었다. 종로경찰서는 1915년부터 1928년까지 이곳에 있다가 종각로터리 건너편으로 이 사했다. 종로경찰서가 새로 자리 잡았던 곳은 강우규 의사를 비롯 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재판하 던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 이 있었는데, 이때 서소문(현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이전하였다. 보신각 서쪽 건너편에는 동학 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의 동 상도 있다.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 에서 패배하고 피노리(순창)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30일 처형 당한 전옥서가 있던 곳이다. 시내 한복판에 동상까지 세워진 전봉 준이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납득 하기 힘든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군의 2차 봉기가 일제의 조선침 략에 맞선 항일의 성격을 띠 고 있 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태화관 터는 3·1독립선언광장 으로 YMCA회관 뒤편 역시 독립운 동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명(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등 4인 제외)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개최한 태화관이 있던 자리 주변은 3·1독립선언광장으 로 조성되어 있다. 태화관 가까이 에 있던 승동교회는 1919년 2월 20일 학생대표 김원벽을 비롯한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참 여하는 학생대표자회의가 개최된 곳이다. ➌ ➍ ➌  신간회 창립총회 소식을 전하고 있는 조선일보 기사(1927.2.14)  ➍  근우회 창립 총회 장면(192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