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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7회) • 논산군의 만세시위(1) 101 3월 2일 천도교 전북 이리교구당 이중열이 송일성 에게 독립선언서 100장 묶음 2다발을 함열교구장 최 대붕과 충남 논산의 강경에 배포하도록 했다. 함열교 구장 최대봉은 받은 1다발에서 33장을 두고 나머지 를 함열 천도교구 신도인 민영순(閔泳淳)으로 하여금 논산교구실에 전달하게 했다. 민영순은 3월 2일 오후 6시경 독립선언서 약 40매 를 가지고 논산으로 가서 읍내 욱정(旭町) 천도교 논 산교구실의 김태호(金泰昊), 이백순(李伯純)에게 전 달했다. 김태호는 한 꾸러미를 가지고 부여로 출발했 고, 이백순은 나머지 한 꾸러미를 3월 3일 새벽 2시 경 논산 읍내 및 기타 길 위에 전부 살포했다.(김태호 등 14명 판결문, 1919. 4. 4) 논산 주재소 순사가 이 를 발견하고 즉시 손필귀 외 2명을 잡아 강경경찰서 로 압송했다. 논산면 만세시위 독립선언서가 전파되었다고 자동으로 독립만세시 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논산면이 보여 준다. 독 립운동에는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모으 고 준비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논산에서는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을 때 천도교 논산 교구장이 경성에 가고 없었다. 전달받 은 독립선언서를 논산 읍내에 뿌렸으나, 곧바로 순사 들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잡아가고, 뿌려진 선언서를 수거해 갔다. 분위기는 살벌하게 얼어붙었을 것이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데 딱 한 달이 걸 렸던 것 같다. 4월 2일 논산면에서 약 700명의 군중이 집합해 독 립만세를 외쳤다. 논산 경찰관주재소 일경과 파견된 일본군 보병들이 출동해 만세시위를 진압하여 만세 군 중들은 해산했다. 이튿날인 4월 3 일 논산면 욱정(旭 町)에서 약 600명 이 전날에 이어 독 립만세를 외쳤다. 주재소 일경들이 다시 출동하여 주 도 인사 10명이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논산 역전 의 취암리에서도 3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가까이에 일제 경찰력이 있는 읍내에서 만세 세위를 한다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고, 금새 탄압을 받아 해산되기 일쑤였다. 그날 밤 논산 주변 산과 언덕 수십, 수백 군데에서 봉화불이 피어올라 깜깜한 밤을 밝혔다. 『매일신보』 에 이날 논산 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나간 3일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 군중이 일어 나 만세를 고창하며 폭행을 시작함으로 일시 시중이 일제시대 논산 5일장 모습 「소요사건의 후보(後報)」란 제목으로  논산 3 · 1운동 소식을 보도한 매일신 보(1919.4.7,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