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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3년 11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일군 부는 독립운동 자금과 동포기관 운영에 크게 기여 했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농장의 한인 노동자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리버사이드(Riverside), 클레어몬트(Claremont), 업랜드(Upland), 레드랜드 (Redlands), 쿠카몽가(Cucamonga) 등지에는 오렌지, 포도, 감나무 등의 농장들이 많았다. 이들 농장에서 일을 하는 한인 노동자를 지도하기 위해, 샌프란시 스코에 있었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1904년 3월 리버사이드로 왔다. 도산은 로스앤젤레스 동쪽 으로 약 45마일(약 72km) 떨어진 리버사이드의 농 장 지역으로 갔다. 리버사이드에서 도산은 알타 비 스타(Alta Vista) 오렌지 농장주 럼지(Rumsey)의 권 유로 그가 빌려 준 1,500달러로 ‘한인노동주선소’ 를 차렸다. 노동주선소는 파차파 애비뉴(Pachappa Avenue) 1532번지에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곳 은 한인 노동자들의 노동주선소이기도 했지만, 도 산 가족의 생활공간이기도 했다. 리버사이드에 노 동주선소가 설립되면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한 인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현재 리버사 이드 코티지 애비뉴(Cottage Avenue)와 파차파 애비뉴 코너의 3에이커 지역에 ‘한인촌(Korean Settlement)’이 있었다. 이 한인촌에 한인노동자 들을 위한 노동주선소의 사무실이 있었다. 리버사이드 한인사회에서 도산은 오렌지 농장 과 노동주선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하였다. 리버사이드에서 동포들을 위한 사업을 할 당시 안 창호는 늘 입버릇처럼,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하 였다.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던 동포들이 이를 그대로 실천하게 되면서, 과수원 주인들을 비롯한 미국인들은 한인들을 신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리버사이드 한인 캠프에 참여하는 동포들이 늘 어나자, 도산은 집을 따로 얻어 야학을 하자고 하였 다. 그리고 리버사이드에서 18명의 한인 노동자들 이 모여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이때의 공립협회는 친목회의 연장적 성격으로 조직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공립협회의 자 치 생활이 자리 잡히고 경제적 토대도 점차 안정되 자 회원들은 힘과 자신을 얻게 되었다. 도산의 동지 들은 그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다섯 사람이 버는 몫을 떼어 활동자금으로 제공하겠다고 강권하였다. 그와 같은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도산은 샌프란시 스코로 가게 되었다. 또한 로스앤젤레스 동쪽의 쿠카몽가(Cucamonga) 지역에는 포도밭, 오렌지밭, 감나무밭이 많았다. 쿠 카몽가에서는 포도를 딴 후, 감을 따고, 감을 딴 후 로스앤젤레스 흥사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