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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3년 11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무슨 까닭인가? 전사는 비록 작다 하나 오히려 조 정의 명관(命官)에 속하고, 담수부는 아문이 비록 높 아도 다른 일에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두보 (杜甫)를 배우는 사람이 한유(韓愈)의 문장도 이루지 못하였으면서[今之學杜韓不成] 자랑스럽게 스스로 대가인 체하는 자는 총독아문의 담수부에 불과하다. 또 섭횡산(葉橫山)은 말하기를, “고인의 시를 잘 모 방하는 자는 표절을 그럴싸하게 하면 우맹(優孟)의 의관(衣冠)처럼 여기고 표절을 그럴싸하게 하지 못 하면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처럼 그렸다고 혹평한다. 남의 남은 기세[餘焰]를 빌려 망령되이 자신을 높이 려는 것이 작은 비장이 되어 스스로 한 무리를 이끄 는 것과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은 요즈음 의 병폐에 딱 맞아떨어진다. 어찌 시문만 그러하다 고 하겠는가? 근세의 학문하는 사람들이 경계 삼을 만하다. 저녁에 도곡(道谷)과 우곡(羽谷) · 주곡(注谷) 세 곳의 내권(內眷)들이 걸어서 도착하였다. 어른과 아이 모 두 13명, 험한 길에 지친 모습이 사람을 몹시 안타깝 게 하였다. 5일 시화를 읽다. 한창려(韓昌黎)의 문왕조(文王 操)에서 이르기를, “제[臣] 죄업이 죽어 마땅함이여! 천 왕께서 밝히 아시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성인의 마음 을 깊이 구명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잘못에 빠진 것이 다. 『시경(詩經)』 「 대아(大雅)」 를 살펴보건대, “문왕이 말 씀하시기를, 네가 서울에서 기세가 건장하여 원망 받 는 것을 덕으로 여기네”라고 하였으니, 문왕은 일찍이 은주(殷紂)를 성명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창려는 어쩌면 「 대아」 를 읽지 않았던 것인가. 소동파(蘇東坡)는 “공자께서는 탕임금과 무왕을 칭 송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주역(周易)』 혁(革)괘의 계사 (繫辭)를 살펴보건대, “탕임금과 무왕이 천명을 혁파한 것은 천명에 따르고 인심에 응한 것이다”라 했는데, 계 사는 공자께서 지으신 것이다. 동파는 어쩌면 『역경(易 經)』을 읽지 않았던 것인가. 이 의론은 극히 정당하다. 설사 한창려와 소동파가 듣는다 하더라도 어찌 자신을 낮추어 자세히 알지 못 한 것을 사과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일(忌日)이다. 하늘 끝 객지에서 예를 갖추어 제사할 수가 없는데다 두 아우 까지 멀리 있어 제사에 참사할 수 없으니, 슬프고 마음 아프기 그지없다. 밤 3경쯤에 꿈에서 어머니 얼굴을 뵈 었다. 누가 유명(幽明) 간의 감응을 두고 그럴 이치가 없 다고 하겠는가? 6일 『경여필독(耕餘必讀)』을 읽었다. 순자(荀 子)의 예론(禮論) 편에, “사람은 태어나면서 원하는 것 이 있고, 원하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욕구가 없을 수 없다. 욕구가 있으나 분수와 한계를 헤아리 지 못하면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다투게 되면 혼란해 지고 혼란하면 곤궁해 진다. 선왕께서 그 혼란함을 싫어하였으므로 예의를 만들고 분수를 정하여 사람 의 원하는 마음을 수양하고 찾는 바를 이루게 하였 다. 이는 다툼으로 말미암아 화평에 나아가게 한 것 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서양의 학자 곽포사(霍布士=토마스 홉스)의 민약설(民約說)과 의논하지는 않았으되 똑같 은 주장이다. 다만 순자는, ‘처음에 나라를 세운 것이 군주의 힘에 말미암은 것이므로 권위가 끝내 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