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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3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또,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이 순국 하면서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가 뭇 사람들의 가 슴을 찡하게 울렸다. “아! 슬프다.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이 이에 이 르렀으니, 우리 민족은 장차 생존경쟁에 진멸(盡滅) 되고 말 것이다. 모름지기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 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한 사람은 도리어 살게 됨을 여러분들은 어찌 알지 못하는고? …… 영환은 죽어 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여러분들을 기어이 도우 리니 우리 동포형제들은 더욱 분투 격려하여 지기 (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 자유독립을 되찾는다면 죽은 몸도 마땅 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 을사오적, 나라를 팔아먹다 일본은 1876년(고종 13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 件, 1875년 9월)을 빌미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정치적 ·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켰다. 이것이 조선에 대한 일본 침략의 첫걸음이었다. 이 때, 조선 은 이 조약에 따라 부산 · 인 천 · 원산을 개항하게 되었는 데, 이로써 일본인의 입국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어서, 일본은 조선의 침략을 위해 1904년(고종 41년) 2월 한 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 제로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이 의정서에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 을 확보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일본의 시정개 선에 관한 충고를 조선이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제 3국의 침략에 의하거나 내란으로 인하여 조선 황실 (皇室)의 안녕보존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 일본은 이 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거나, ‘이 목적을 위하여 군 사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사용할 수 있다’거나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 의정서에 근거 하여 경의선(京義線)과 경부선(京釜線) 두 철도를 착 공하고, 조선의 해안과 하천의 통항권을 획득하였다. 뒤 이어진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22일)을 통 하여 식민지화를 위한 터전을 다져나갔다. 이 협약 에 의해 조선은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초빙하여 재정에 관한 일체 의 사항을 그에게 자문한 후 시행케 했다. 또 일본 정 부가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으로 초빙하여 외 교에 관한 중요한 업무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해 야 하고 외국과의 조약체결 기타 중요한 외교안건 에 관해서는 사전에 일본 정부와 협의하여 시행케 을사늑약 조약문(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고종의 서명날인이 없다.  당시 학부대신 이완용 (1858~1926). 대표적 친일매국노로 악명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