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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3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혼란에 빠뜨린 지진은 강도 7.9였다. 지금까지 알려 진 피해상황은 관동지방에 2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10만의 사망자와 1백억 엔 이상의 재산 피해가 났다. 이에 일본정부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1923년 9월 3일부터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 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인을 검속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왜 죽었을까. 적어도 6천명 이상의 조선인이 죽어간, 정확히 말하면 학살당한 관동대지진은 유언비어가 계기였다. 박열은 관동대지진 상황이 궁금했다. 9월 2일 오 후 5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요츠야(四谷)의 후세 다츠지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잡지 광고를 청탁했 다. 아울러 지인들을 만나 지원금으로 20엔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집 앞에서 경 찰에 검거 당했다. 이튿날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도 검거되어 세타가야(世田谷)경찰서에 보호검속 당하 게 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는 일본 황세자 결혼 식 때 천황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형벌 이 사형 하나 뿐인 대역죄(大逆罪)를 적용했다. 일제 검찰은 1924년 2월 14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 중한에 대해 ‘천황 폐하와 황태자 전하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대역 예비죄’라고 예심을 종결지었다. 박 열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심문조사를 받 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본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이 과정에 서 항일과 반천황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도쿄지방재판소 예심법원에서 2년여에 걸친 다테 마츠 가이세이(立松懷淸) 예심판사와의 끈질긴 법정 투쟁에서 박열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 고 대범하게 천황, 황태자의 폭살의도를 밝혔다. 법 정투쟁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직접적이고 폭 발적인 강렬한 불굴의 투쟁이었다. 그는 항상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일제의 권력 중심부인 천황과 대치 하여 사실에 입각한 논리 정연한 이론을 펼쳤다. 그는 천황 및 천황제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명확 히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민중의 입장을 대변 하고, 그 연결선에서 일본의 천황과 그 황실에 대해 자신의 확고한 반대 신념과 의지를 표현했다. 1926 지진 직후 일본군에 체포된 조선인들(강덕상자료센터 제공)   일본인 화가 기코쿠가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등을 그린 그림 책의 일부(고려박물관 제공). 올해 6월 처음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