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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 서상교 · 최낙철 · 신기철 지사 67 최낙철과 대구사범학교 연구회 최낙철은 1921년 11월 22일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1 년 1월 임병찬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연구회(硏究 會)’를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이 가까운 장래에 반드 시 독립할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각자가 관심 있는 학문을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방면에서 최고 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회원은 모두 5학년생이었다. 1월부터 3월까지 사 범학교의 교과목을 중심으로 교육부·문학부·이과부· 지리부·수학부·역사부·농업부·공업부·종교부·전기과 학부·문예부·물리부·정치경제부·음악부 등 14부를 편성하였다. 최낙철은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이들의 활동방침은 ①회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②회원은 매 월 1일 각자 분담 부문의 연구 사항을 발표한다, ③ 각 부문의 책임자는 해당 부문의 하급생을 지도 교 양하고 동지의 획득에 노력한다 등이었다. 회원들은 1941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의 모임을 갖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졸업 후 교사로 부임하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 립에 대비하여 우수한 조선인 학생에게 이른바 ‘천재 교육’을 시행하여 민족의 지도자로 양성하며, 현지에 서의 활동을 매월 1회 보고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회원들이 모두 졸업을 앞둔 5학년생이어 서 더 이상의 활동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임병찬 과 장세파는 4학년생 유홍수 등으로 하여금 1940년 11월 박효준의 주도로 결성되었던 비밀결사 대구사 범학교 문예부와 연구회를 통합하여 1941년 2월 다 혁당(茶革黨)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지속하도록 지 도했다. 다혁당의 주요 활동은 한글로 된 조선 역사 와 문화 관련 서적을 윤독하여 독후감을 발표하고, 방학에는 귀향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을 퇴치하 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체력 단련과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1941년 3월 졸업 후 함경북도 나진의 약초공립국 민학교에 부임하여 연구회의 활동을 수행하던 최낙 철은 같은 해 7월 대구사범학교의 학생비밀결사가 적발되면서 체포되었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가택수색 과정에서 민족적 내용을 담은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었다. 이후 대 구사범학교 졸업생과 교직원, 학부형 등 3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34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5명이 징역 5년, 2명이 징역 3년, 27명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5명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최낙철은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출옥했 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98년 3월 대구 두류공원에 대구사범학교학생독 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다. 2005년 8월 6일 사망 하였다. 신기철과 춘천고등보통학교 상록회 신기철은 1922년 1월 24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 났다.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보통 학교에 재학 중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했다. 상록회는 1937년 3월경 춘천고보 남궁대 등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목적으로 결성했다. 강 령은 ①회원으로서의 자기완성, ②지도자로서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