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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다. 이들은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을 거점으로 초 모공작을 전개하였다. 1944년부터 초모공작의 성과가 나타나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이 지하공작 대원을 통해, 또는 중 국군 유격대의 협조와 안내로 부양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임천(臨川)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 교 내에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을 설치하고 교육 과 훈련을 받았다. 한광반을 졸업한 후 이들은 모두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광복군 개편에 따라 김학규는 제3지대의 지대장이 되었고, 부대의 규모는 180여 명에 달했다. 처음 8명의 기간요원으로 시작된 제3 지대는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한국광복군 부대가 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김학규는 상해의 한국광복 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 滬 辦事處) 처장, 만주 심 양(瀋陽)의 한국독립당 동북특별당부 위원장, 임시정 부 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 부처장 직을 겸직하면 서 동분서주, 교민들의 관리와 귀국 업무에 힘을 쏟 았다. 그밖에도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아래 심양 에서 장연민주자위군(長延民主自衛軍)을 편성하고 중국 동북지역의 한인청년 1천여 명을 모집 훈 련시 키기도 했다. 하지만 1948년 봄부터 국공내전의 와 중에 만주지역의 시국이 긴박해 짐에 따라 만주 교 민들을 국내로 귀환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김학 규는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국 공군 센노트 중장 과 미국 군정청의 협조를 얻어 비행기와 선박을 통 해 교민 1만여 명을 국내로 귀국시키는 어려운 작업 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김구 선생을 지키다 끝내 쓰러지다 이 때문에 김학규가 정작 귀국한 것은 1948년 4월 19일이었다. 그는 서울의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 갔으나, 김구는 이미 남북협상차 북쪽으로 떠난 후 였다. 5월 5일 서울에서 김구를 만난 김학규는 가슴 이 답답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때의 심경을 다음 과 같이 피력했다. “여름 시절의 동지들로서 그 누구누구들이 사생 (死生)의 동지로 있지 않았는가? 지금 가을에 서리가 오고 겨울에 눈보라 치니, 그들은 다 자기네 영달을 한국광복군 참모 시절 사령관  이청천과 함께(오른쪽) 광복군 부양판사처장 시절의  김학규(국가보훈부 제공)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기념 전례식(1945.6.30, 부양시 인민극장 ,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