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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의 생애와 독립운동 43 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그동안 자금과 무기를 공급해 주 던 당취오의 요녕민중자위군도 분산되면서 어려움은 더욱 가중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혁명군 은 중국 관내(산해관 서쪽, 즉 중 국 본토)로의 이동을 모색하게 되 었다. 이때 김학규가 대한민국임 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조선 혁명당의 전권대표로 관내지역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제 군경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부인 오광심과 동반하여 농부로 변장한 후 남만주의 안동(安東), 산동반도의 청도(靑島), 천진(天津), 북경 을 거쳐 남경에 도착하였다. 1934년 5월이었다. 그 는 조선혁명군에 대한 임시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역 설하고, 중국 관내 상황을 조선혁명군 본부에 보고 하였다. 동명중학 교사 출신의 오광심 여사가 일제 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책 한 권 분량의 보고서를 숫 자 하나 틀림없이 통째로 암기하여 보고 했다는 신 화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김학규는 조선혁명군 대표의 일원으로서 중 국 관내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 정당들의 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합운동이 지지부진해지자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여산(廬山) 특별훈련반에 가서 1년 동안 군사학을 습득하기도 했다. 한국광복군 창설과 제3지대장으로 활약하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전시 수도 였던 중경(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 로 창설되었다. 임시정부가 1932년 상해를 떠나 8년 동 안의 기나긴 이동 생활을 끝내고 중경에 안착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대일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 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중경에는 병력으로 동 원할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독립군 간부 출신 들을 중심으로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였고, 하 부 조직은 병력을 확보하여 편제한다는 방침이었다. 광복군 총사령부의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 석이 임명되었다. 김학규도 총사령부 참모로서 참여 하였다. 광복군은 창설 당시 ‘1년 이내에 최소한 3개 사단 편성’을 당면 목표로 설정했는데, 이를 위해 병력을 모집하여 군대를 증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이에 따라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모병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1942년 4월 징모처 제6분처가 구성되면서 대원들은 임지로 떠나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징모 처 제6분처는 처음 제3지대장인 김학규를 비롯하여 오광심·신송식·지복영·오희영 등 8명으로 편성되었 유하현 삼원포 동명중학 근무시절 의 김학규 · 오광심 부부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시절의 김학규와 광복군  대원 오광심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