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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투쟁을 자제하고 본부는 북만주 액목현(額穆縣)으로, 졸업생들은 연성대(硏成隊)를 구성하여 청산리전역 에 참가하게 된다. 김학규는 이때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가 구사일 생으로 탈출하였고, 우연한 기회에 봉천 신민현에서 영국인 오밀브나(Omelvena) 목사가 경영하는 문 회고급중학(文會高級中學)이라는 중국인 학교에 들 어가게 된다. 김학규가 운명처럼 만나 공부하게 되 는 문회고급중학은 이후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 가 되었다. 즉 김학규는 이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웠 고, 영국인에게 영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때문에 누 구보다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영어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국어 능력은 후에 그가 조 선혁명군의 군사 간부로서 중국의 구국군과 합작협 상을 벌이거나,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미군의 첩보 전략 기구인 OSS와 군사합작을 벌이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동명중학교 교사(이후 교장)가 되어 평생의 동지이자 동반자인 오광심(吳光心) 여사를 만나게 된 것도 이즈 음이었다. 김학규는 유하현(柳下 縣) 삼원포 동명중학교 교장으로서 교육구국운 동을 계속하 는 한편, 다시 무쟁투쟁의 일선에 나서 게 된다. 1929년 흥경현(興京縣, 현재 신빈현) 왕청문 (旺淸門)에서 민족주의를 표방한 조선혁명당 창당에 참여한 것이 그것이다. 이듬해(1930년) 봄에는 동명 중학교를 떠나 조선혁명당(黨), 조선혁명군(軍), 국민 부(政) 등의 핵심 간부가 되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처음 조선혁명군 총사령부 부관장으로 있던 김학규는 양세봉(본명 梁瑞鳳, 1896~1934)이 총사령으로 선임된 후 그의 막료로 들어가 소장 계 급의 참모장이 되었다. 이후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 당취오(唐聚五) 총 사령이 지휘하는 요녕민중자위군에 소속되어 일본 군과 200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르며 용맹을 떨쳤 다. 이러한 전투를 통해 조선혁명군은 무적의 군대 라는 용맹을 떨쳤고, 32세의 청년장교 김학규도 유 창한 중국어로 군사협정 체결을 성공시켰을 뿐만 아 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며 한중 민 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1933년 10월 부터 시작된 일제의 ‘치안숙정공작’으로 조선혁명군 서로군정서 의용대 재무부 영수증(1921 년 1월, 연합뉴스제공) 2009년 9월 말 신빈현 왕청문진 강남촌 다자피거우(大夾皮溝)에 옮 겨진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의 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