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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의 생애와 독립운동 39 28세의 나이로 평양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서원준의 군자금 모금 계획은 독립을 열망하는 여 러 사람의 도움과 원조가 뒷받침되었다. 그를 만주 로 이끈 김관우, 조선혁명당의 안동현 연락원 김병 모, 동아일보 남시 지국장으로 있으며 남시역 사건 에 일조한 한신옥이 있었다. 또한 이른 바 ‘평양권총 의거’를 함께한 안영준, 일본 경관의 눈을 피할 수 있 도록 도주의 길을 도운 우현규, 박문효 등이 있었기 에 서원준의 군자금 모금 계획은 시도 될 수 있었다. 서원준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 럽게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었다. 일제의 자 본 속에서 조선인들이 겪는 비참함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도록 만들었을 것 이다. 또한 서원준은 19세의 나이로 점원상조회의 간사로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평양노동청년운 동으로 인해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했을 때 여러 민족 운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적극적 무장투쟁 독립운 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서원준의 바탕에는 어려서부터 키워왔던 한국적 아나키즘 사 상, 그리고 노동운동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이 발전되어 강렬한 민족주의로 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죽음을 불사한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으 로서의 국내 특공작전 행보는 각성된 노동자에서 죽 음을 각오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로 변모한 보기드 문 인물의 유형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만주 독립 운동 세력의 국내 침투작전과 군자금 모집운동, 연 계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좀더 주목하고 적극적 으로 연구 · 교육,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수원대학교 사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사)인천문화재보존 사업단 ‘인천문화재돌봄센터’ 모니터링 팀장을 맡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혁명 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 - 노동자에서 독립군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91,  2017이 있다. 필자 김빛나 서원준의 중국 상해 재류시절과 소년시대 사진을 실은 동아 일보 기사(1933.6.7)  서원준 사형집행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3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