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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원준이 일본 순사부장을 권총으로 저격한 것은 10일 오후 2시경이었다. 황해도 안악군 학산리까지 이동 한 서원준은 그곳에서 만난 박문효에게 자신의 사정 을 설명하고 사리원까지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박 문효는 서원준을 장사꾼으로 변장시킨 뒤 사리원 방 향까지 동행했다. 이후 홀로 봉산군 서종면 대한리 까지 이동했는데, 순찰 중인 일본 경찰에게 신체 수 색을 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원준은 정체가 탄로가 날 것을 우려해 토미다(富田) 순사부장에게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대로 복부를 관통당한 토미다 부장은 며칠 뒤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더욱 삼엄해진 경비로 인해 사리원 방향으로 가지 못한 서원준은 평안남도의 북쪽으로 이동하려고 헸 다. 하지만 육로 이동은 더 이상 어려웠다. 이에 대 동강을 헤엄쳐 평양 인근으로 옮겨간 뒤 순안을 거 쳐 안주군에 도착하였다. 안주에서도 일경 순찰대와 교전을 벌인 후 50km를 남하하여 평원군으로 이동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10일이 넘는 기간동안 무려 250km가 넘는 이동 거리, 여러 차례에 걸친 순사, 무장대와의 교전으로 인해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결국 평남 평원군 동송면 청룡리의 주막에서 6월 16 일 오후 11시 체포되었다. 서원준은 체포 당시 “내가 서원준이오. 저항하지 않을 터이다.”, “모든 것을 각오하였다.”라는 말로 본 인의 의지를 드러냈다. 서원준의 14일간의 경로는 『동아일보』 1933년 6월 18일, 「홀현홀섬 반삭동안 남북주파 칠백여리」를 통해 평안남도 평양부터 황해 도 봉산까지 13개 군에 달한다고 확인된다. 그는 1935년 2월 14일 최후 판결 공판에서 치안 유지법위반, 강도, 강도예비, 살인, 살인미수, 총포화 약류취체령위반, 동시행규칙위반, 사무집행방해 등 총 8가지 죄명으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서원준은 사 형 언도를 받은 후 “지난 일은 내가 판단할 필요가 없 다.”고 말하며 본인의 행동에 대하여 후회 없는 심경 을 나타냈다. 법정에서 결연한 의지로 묵묵히 판결 을 받아들인 그는 1935년 4월 31일 오전 10시 30분, 서원준의 국내 특공작전 활동을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호외(1933년 6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