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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 서원준의 생애와 독립운동 35 서원준은 1933년 조선혁명군 국내유 격대장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을 모집한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이 었다. 같은 해 6월 ‘평양권총사건’이라  불리며 각종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큰  관심을 끌었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서원준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그의 과감하고 결사적인  국내 특공작전 행보는 각성된 노동자 에서 적극적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로  변모한 보기드문 인물의 유형을 잘  보여주었다. 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국내 침투작전과 군자금 모집운동,  연계 노력의 일환이라는 관점에서 좀 더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연구 · 교육하 며 높이 평가할 가치가 있다. 조선혁명군은 조선혁명당의 독립군으로 1929년 남만주 서간도 지방 (주로 평안북도 압록강 건너편)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1938년 해체되기 전까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인력과 자금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듯이 조선혁명군 또한 같 은 문제에 놓여있었다. 때문에 조선혁명군은 1932년에는 16차례에 걸 쳐 101명의 대원을 국내에 침투시켜 활발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 기도 하였다. 그 중 서원준은 1933년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으로 국내에 파견 되어 군자금을 모집한 대표적인 인물중 한 사람이다. 같은 해 6월 ‘평양 권총사건’이라 불리며 각종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던 군자금 모금 활동 은 서원준의 독립운동 중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노동자 집안에서의 출생과 노동운동 서원준(徐元俊)은 1908년 5월 25일 평안남도 중화군의 노동자 집안 에서 태어났다. 목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중화에서 평양으로 이사한 후 야학에서 수학한 것으로 확인된다. 평양 에 정착한 후 윤세식, 김승기 등의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양말공장 에서 직공으로 일하는 등 가난한 집안을 부양하기 위한 노동자로서 삶 을 살았다. 하지만 여러 상점에서 일하면서도 야학에서 3년 동안 수학 했다는 어머니의 증언으로 보아 배움에 대한 열의가 크고 사회적 문제 에 많은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원준이 평양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다양한 운동론에 근거한 민족 해방운동이 전개되었고, 청년·노동·농민·교육단체 등이 활발하게 조직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야학의 설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점원 야학강연회, 평양청년야학회 등이 개최되었다. 또한 평양은 이전부터 경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1897년 진남포 개 항 이후부터 일제의 자본이 유입되며 본격적인 무역업이 이루어졌다. 1917년 이후에는 제철공장, 시멘트회사, 제당회사, 조선전기흥업회사 등이 건설되면서 공업도시로 커나갔다. 서원준은 변화하는 평양의 모 습을 보며 성장기를 보냈고,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