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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민족운동 33 단체인 대한국민당 전 남도당부 발대식에서 광주시당부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이처럼 그는 해방정 국기 여러 직책을 맡 으며 정치 · 건국운동 에 참여했으나, 그 직 책을 오래 수행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병 자·빈민을 위한 구호사업과 교육활동에 더욱 지속적 인 관심을 쏟았다. 1945년 9월 그는 한국나예방협회 를 조직했고, 1948년 3월에는 증심사 객사에 광주국 민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음성 나환자 정착촌인 나주 호혜원(互惠院)과 결핵환자 요 양소인 광주의 송등원을 설립하고 환자들과 동고동 락했다. 1951년에는 한국사회사업협회 위원장에 추 대되었다. 그러던중 1964년 12월 지인들에게 「유언장」을 작 성 · 발송하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4일 사망했다. 5월 18일 열린 그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의 시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광주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 최흥종 오방 최흥종은 근대 광주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 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19년 서울에서의 3·1운 동에 참여했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조 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과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 을 역임했다. 실제로 광주지역 민족운동계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대한제국기 순검(巡檢)으로 있으면서 의병 들 을 후원했다고 하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 다. 또 일제강점기 3 · 1운동, 신간회운동 및 각종 사회 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농민운동), 그리고 병자·빈 민들을 위한 구호활동과 교육활동에도 큰 관심을 보 였다. 아울러 해방정국기에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건국운동에도 관여했다. 여기에 목 사로서의 종교활동까지 더한다면 그의 관심과 활동 의 영역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최흥종 사회장(최흥종기념관 제공) 노년기의 최흥종 필자 한규무 서강대학교 사학과 및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한국 근대민족운 동사를 전공하고 있으며, 현재광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 다.  주요 저서로 『한국 기독교 농촌운동 연구』, 『기독교 민족운동의 영 원한 지도자 이승훈』, 『광주학생운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