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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023년 11월 Special Theme   제 84회 ‘순국선열의 날’ 기획특집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다시 생각한다 은 크게 낙심했던 듯 하며, 스스로 ‘오방(五放)’이란 호 를 지은 것도 이 무렵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나 환자 구호를 위한 구라(救癩)사업을 중단하지 않았 다. 1933년 4월 그는 조선총독부를 방문하고, 경무국 장과 위생국장을 면담하면서 나환자를 위한 6개항을 진정했다. 1937년 1월 그는 구라사업과 빈민구호을 제외한 외부활동의 중단을 선언한 이른바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교 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촉(促)」함이란 글을 『성서조선』에 기고하여 한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 했다. 이 무렵 그는 제도권 교회를 떠나 ‘무교회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등산 증심사(證心 寺)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 · 빈민들을 위한 활동에 전 념했다. 해방과 함께 전남건국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되다 최흥종은 1945년 8 · 15해방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 게 되었다. 국기열의 집에 모인 인사들은 “광주시민 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최흥종이 전남건국준비위원 회 위원장의 적격자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은거 중인 그를 찾아가 위원장 수락을 부탁했다. 최흥종은 이 를 사양했으나, 이튿날 광주극장에서 열린 전남건국준 비위원회(전남건준) 결성식에 축사를 하기 위해 참석 했다가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위원장으로 재임한 기간은 불과 17일뿐 이었고 이후 전남건준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이어 9월에는 우익계열단체인 고려청년당 창립준 비회 고문으로도 추대되었다. 초대 전남도지사인 최 영욱의 형이기도 한 그는 1945년 11월 제1회 도지사 고문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좌·우 양측은 물론 미군 정 역시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가 기독교 목사라는 점도 미군정에 호감을 주었을 것으 로 짐작된다. 1946년 9월에 이어 1948년 9월 광주를 방문한 김 구(金九)는 10월 3일 무등산 오방정(五放亭)을 찾아 최흥종과 면담했다. 김구(1876년생)는 최흥종(1880 년생)보다 연장자였다. 그럼에도 70대의 노구를 이 끌고 직접 무등산을 올라 그를 방문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하다. 1948년 최흥종은 호남신문사 초대회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했다. 1950년 1월에는 우익계열 1948년 광주를 방문한 김구가 최흥종에게 써준 유묵 ‘화광동진 (和光同塵)’. 자기의 지혜와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최흥종과 전남 나주 소재 호혜원 아이들(최흥종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