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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민족운동 31 무소)에서 출옥한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학업을 계 속했고, 북문밖교회 담임목사를 맡으며 같은 교회에 유치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다시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즉 그는 1920년 8월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으로서 9월에 열린 전국회의에 참석하면 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광주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 제1대 회장에 그가 취임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 때문인지 그는 1921년 1월 당국으로부 터 ‘갑종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같은해 광주YMCA 회원들과 함께 일본산 마약인 몰핀방독회를 조직하고, 1922년 광주 YMCA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고 한다. 그는 북문안 교회 담임목사로서 1923년 9월 광주소작인회연합회 대표로서 소작권 이동방지 등 7개항에 대해 동양척 식주식회사(약칭 동척) 당국과 교섭했다. 또 1924년 3월 전라노농연맹 발기회에 광주지한면소작인회 대 표로 참석했다. 노동운동에 이어 농민운동에도 관심 을 보이게 된 것이다. 1924년 그는 광주YMCA 회장 에 취임했다. 이밖에도 광산회 총무(1923), 서선(西鮮)수해구제 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보고창립 기성위원(1926) · 광주협회 위원 (1926) 등을 역임했다. 이같이 여러 단체에 가담한 그 는 1920년대부터 분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중재자로서 역할을 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초대 지회장에 취임하다 최흥종은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선교사가 되 어 출국했지만,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 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에 귀국했다. 같은해 10월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준비위원회에서 그는 취지설 명을 하고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열린 창 립총회에서 초대 지회장에 취임했다. 신간회의 ‘좌우 연합적’ 성격으로 볼 때 최흥종은 양측으로부터 모두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지회장으로 추대된 것이라 여 겨진다. 이밖에 그는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위 원,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이사, 사립보통학교유지 방침연구회 위원,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 광주철 도기성회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1929년 3월 무렵부터 신간회 광주지회장 으로서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확실치 않 으나, 당시 신간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중앙 · 지방에서 의 민족주의계열 · 사회주의계열의 갈등과 무관치 않 았을 것이다. 1929년 6월 기독교의 전남노회(全南老 會)는 그를 제주도 모슬포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하 기로 결의했고, 이에 따라 그는 7월 광주를 출발했다. 구라(救癩)사업과 빈민구호에 평생을 헌신하다 1929년 7월 제주도로 내려온 그는 모슬포교회에 부임했다. 그런데 1930~1931년 무렵 여수의 조선나 환자공제회 회장이 그를 찾아와 나환자에 대한 지원 을 부탁하자, 최흥종은 이를 수락했다. 1931년 7월 모슬포교회 담임목사를 사직한 그는 9월 조선나병환 자구제회를 설립했으며, 이 구제회에서는 다시 조선 나병환자근절연구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구제회와 연구회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는 못했던 것 같다. 최흥종이 고군분투했지만 여의 치 못했고, 결국 1932년 6월 서울의 나환자 30여명 을 데리고 여수 애양원으로 내려갔다. 이때 최흥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