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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오방 최흥종의 생애와 민족운동 29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  1966)은 근대 광주지역 민족운동 과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19년 서울 3·1운동에 참여했다 가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과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지냈다.  실제로 광주지역 민족운동계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그는  대한제국기 순검(巡檢)으로 있으면 서 의병들을 후원했다고 하며, 국 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  일제강점기 신간회운동 및 각종 사 회운동(청년운동·노동운동·농민운 동), 그리고 병자·빈민들을 위한 구 호활동과 교육활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해방정국기에는 전 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건국운동에도 관여했다. 여기에  목사로서의 종교활동까지 더한다 면 그의 관심과 활동 영역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포된 의병들을 몰래 지원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은 1880년 5월 2일 광주에서 탐진(耽津, 현 재 강진) 최씨 최학신(崔學新)과 담양 국씨(菊氏) 부인의 차남으로 태어 났으며, 초명은 ‘영종(泳琮)’이었다. 5세 때 모친을 잃고 계모인 공씨(孔 氏) 밑에서 자란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장터에서 ‘주먹’으로 유명 했다고 하며, 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1904년 12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며, 1907년 세례를 받으 면서 ‘흥종(興琮)’으로 개명했다. 1905년 그는 광주군 경무청의 순검(巡 檢, 현재 경찰)이 되었다고 하는데,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의 부하 12명 을 화순에서 압송하던 중 몰래 풀어줬으며, 순창에서 총살 직전의 의병 6명을 감옥에서 풀어주었고, 의병 백낙구·이백래·임창모 등이 수감되었 을 때 따뜻하게 보살폈다고 한다. 또 의병장 채기문을 체포하라는 명령 을 받고 미리 그에게 알려줘 도망치게 했으며, 보성의 의병장 임창모의 부하 10여명도 계책을 세워 살려줬고, 의병장 백낙구와는 감방에서 부 둥켜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최흥종은 1907년 광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같은 해 3월에 조직된 것으로 보이는 국채보상운동 관련 조직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의 발기인 이었으며, 40전을 의연(義捐)했다. 그가 순검 을 사직한 이유가 “간판을 떼어오고 주동자 를 체포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광주농공은행에서 잠시 직장 생활을 하다 이마저 사직하고, 1908년 3월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윌슨(Robert M. Wilson)의 어학선생 겸 광주선교진료소 조 수로 취직했다. 서울에서 3 · 1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투 옥되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 이후 최흥종은 광 최흥종 등 8인이 국채보상을  위해 ‘대동의상회’를 발기한  소식을 보도한 『황성신문』  기사(1907년 3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