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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023년 10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①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라 하였다. 송대 선현의 활달한 기질이 필경 이와 같았음을 세속의 소장부들에게 부친 뜻이니, 대개 깊 이 칭탄한 말이다. 그러나 끝내는 풍속과 교화를 무 너뜨린 일이니 지금의 학자들은 단연코 행하지 못할 일이다. 신시(申時) 무렵에 족숙 승원(承元)씨가 도착하였 다. 그 편에 듣자 하니, 덕초(德初) 일행이 봇짐이 아 직 도착하지 않은 까닭으로 홀로 뒤쳐졌는데, 26일 에 비로소 외종 아우 조만기(趙萬基)와 더불어 배를 타고 거구(車溝)로 향하였다 한다. 오늘 읽은 석주의 일기에서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내용은 무엇보다도 망명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생 계수단에 대한 석주의 구체적인 고민의 흔적들이다. 주지하듯이 1911년 4월에 석주 등 망명객들은 삼원 포에서 동포 300여 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열었다. 항 일민족독립운동의 방향과 진로를 모색한 이 모임에 서 서간도 최초의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 설립이 결 정되었는데, 이때 ‘개농주의(皆農主意)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이 합의되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일기에는 바로 그 구체적인 석주의 고민이 쓰여 있었다. 석주는 우리나라가 수리시설에 전혀 무관심 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옛날 제방 중 허물어지거나 터진 데를 보수할 만 한 것은 혹 함부로 갈아 민간의 밭을 만들거나 혹 메워 없애고 길을 닦았다. 그 밖에 강 연안이 나 시내를 낀 땅도 몽리(蒙利)를 개설할 만한 곳 이 많다. 그러나 지방 수령된 자가 전연 마음을 쓰지 않는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 국토가 어찌 척박하지 않겠으며 백성이 어찌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이곳에 이주해 온 뒤로는 밭곡식만을 먹을 뿐인데, 거기다 풍토까지 매우 달라 병이 나기 더욱 쉽다. 부득불 버려져 황폐해진 토지를 사들이고 벼를 심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없다. 마 땅히 농사에 익숙한 자로 하여금 널리 수리를 살 펴서 그 이익의 대소와 공역의 다과를 헤아리게 한 뒤에 품을 사서 보를 쌓아야 한다. 몽리(蒙利)란 저수지나 보 등의 수리 시설을 이용 하여 물을 받는 것을 말한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 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후에 읽어도 늦지 않다’ 고 말했던 석주 다운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생각을 확 인할 수 있다. 또한 일기에는 석주의 외아들 동구 이준형 (1875~1942)이 등장한다. 1911년 당시 석주는 외 아들 이준형(당시 36세), 손자 병화(당시 5세) 등 50 여 가솔을 이끌고 망명 한 터였다. 이준형은 만주에 서 아버지를 모시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경학사, 부 민단,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석주가 순국한 후에 귀국한다. 그런데 귀국 후에 임청각 가까운 곳에 경찰서가 있 어서 항상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또 일본 관료들이 친일을 강요하며 회유하자 이준형은 가족을 이끌고 임청각을 떠나 교통이 불편한 월곡면 도곡동, 일명 ‘돗질’로 거처를 옮겼다. ‘돗질’은 재사(齋舍)가 있는 곳 으로 임청각으로부터 강을 따라 꼬불꼬불 30리 길이 었다. 그곳에서 이준형은 망명 20년을 기록한 『석주유 고(石洲遺稿)』를 10년 동안 정리하였다. 지금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