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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왕산 허위의 삶과 항일의병항쟁 83 하고 있으니, 황제(고종)가 대궐 안에 있었지만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의병을 다시 일으켜 13도창의군 군사장이 되다 이를 지켜본 민중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전 국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는데, 민종식(閔宗 植)이 충청도 홍주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도 순창에서, 기우만(奇宇萬)이 순천에서, 이강년(李康 秊)이 경상도 문경에서, 신돌석(申乭石)이 평해에 서, 정환직(鄭煥直) · 정용기(鄭鏞基) 부자가 영천에 서, 류시연(柳時淵)이 안동에서, 박연백(朴淵伯)이 의성에서, 홍범도(洪範圖)가 함경도 갑산에서 창의 하였다. 이 때, 왕산은 임진강 유역에서 창의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 다. 1907년(고종 44년) 헤이그(Hague) 밀사사건으 로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되고, 그 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면서 군대가 해 산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또한, 이 때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에 항거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기도 양주에서 13 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창의하여 전국적인 조직 을 만들어 의병전쟁의 합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 였다. 이 때, 모인 의병부대는 16개였으며 의병의 수가 8,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 으로 추대하고 왕산은 참모장에 올랐다. 1908년(순 종 2년) 1월, 총대장 이인영과 참모장 왕산은 의병대 를 지휘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는 작전을 세우고 동대 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 나, 일본군의 철저한 대비에 막혀 그 뜻을 이루 지 못 하였다. 그 후, 왕산은 마음을 가다듬고 가평 · 적성 방면의 의병을 재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중 6월 11일 경기도 양평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체포되 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1908년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의병들을 기리는 ‘13도창의군 탑’.  서울 진공은 실패했지만, 의병장 허위의 호를 딴 진격로(왕산로)는  남았다(경기일보 제공).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