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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왕산 허위의 삶과 항일의병항쟁 81 어나면서 양반 지주층에 대한 보복이 곳곳으로 확산 되므로, 맏형 허훈과 함께 환란을 피하여 경북 청송 군 진보로 이거하였다. 이 때 우리 조정에서는 나라 의 자체 병력으로 동학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 단하고 청(淸) 나라의 군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큰 불씨를 불러왔다. 일본이 천진조약(天津條約, 1885년)을 빌미로 서울에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할 기회로 삼았다. 일본은 이 기회에 청 나라를 조선에서 배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러시아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게 되 었는데, 조정에서는 청 · 일 양국의 세력을 견제할 목 적으로 친러적(親露的) 정책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렇 게 해서 조선은 외세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러한 어수선한 상황에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 등에 의해 서 참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을미사변(乙 未事 變)’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대일감정이 극단적으로 악 화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며 항 일의병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이것이 ‘을미의병(乙未 義兵)’이다. 1896년 을미의병 봉기 이 때, 항일의병의 중심은 춘천 · 지평 · 원주 · 제천 · 평 명성황후 영정(연합뉴스) 남산자락에 있던 일본 신문 ‘한성신보’ 사옥앞에 선 사장, 주필,  편집장 등 기자들. 이들 무리가 왕후 살해단 행동대 주역이다(뉴 데일리 제공). 순종이 황태자 당시 쓴 ‘奬忠壇(장충단)’비(국민일보 제공). 서울 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 공원 경내 소재. 을미사변 당시 궁내부 대 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 과 싸우다 죽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