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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④ 79 과 함께 소안학교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 하기도 했다. 한편 평양형무소 출소 이후 정남국은 다시 도일했 다. 현재 자료상으로 확인되는 1930년대 도항 이후 정남국의 활동은 우선 전협(정식 명칭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계가 지도한 도쿄의 노나카폐품가게(野 中屑物問屋)쟁의를 들 수 있다. 이때 몇 사람의 조선 인과 함께 이 쟁의에 개입했던 것 같다( í�� 社會運動の 狀況�� , 1932 참조). 이후 정남국은 1933년 일본에서 조선실업자 대책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철도노동자 해고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 1934년에는 친일 단체 테러사건 으로 구속되어 나고야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 했다. 그후 일본에서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정남국의 활동과 그 의의 일제강점기 ���선의 민족운동에 있어 지역단위에 서 반일투쟁이 활발했던 장소로 우선 거론하는 곳이 소안도이다. 일찍이 소안도는 외부와의 접촉과 사회 내적인 요구에 기인하여, 반일투쟁이 활발했던 지역 이다. 소안의 반일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도, 그리고 1920년대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도 계 속 되었다. 특히 1930년 전라남도 다도해 지역의 혁 명적 농민운동은 소안도의 반일투쟁이 한 계기로 작 용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는 걸출한 활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송내호, 송기호 형제와 정남국, 그 리고 정창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정남국은 국내외를 오가며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 던 인물이다. 그는 소안도에 있을 때는 선진적인 청 년, 사상단체에 가담하고 지역의 운동을 견인했으며, 서울청년회계의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론적 토 대를 다졌다. 이에 따라 지역의 운동가에서 머물지 않고, 전국적 규모의 반일투쟁 조직에 적극 가담했 다. 그 모습은 노농���동단체의 연합을 통해 알 수 있 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서 노동운동에 종사하고, 한 편으로 국내와 지속적으로 조직적인 유대를 가지면 서 정치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는데, 한국공산주 의운동사에서 양대 당 조직으로 평가되는 조선공산 당과 춘경원당에 가담했다. 정남국은 일본에서 국내운동의 경험과 소안지역 출신들의 지원 아래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책임 을 맡고, 1927년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극성 기를 주도적으로 맞이했다. 이 가운데 국내와의 조 직적인 연대투쟁의 사례인 소안학교 사건은, 일본에 알려져서, 국제적 투쟁을 도모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본고는 박찬승, 「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 운동 」 , 『도서문화』(11), 목포대도서문화연구소, 1993 및 김인덕, 『일제시대 민족운동가 연구』, 국학자료 원, 2002 등을 주로 참고함)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보��처 연구원, 일본 와세다대 학 연구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일본 국제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과장, 성균관대 동아시 아학술원 연구교수, 한일민족문제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 청암대학교 교수 · 재일 코리안연구소 소장, 재외한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식민지시 대 재일조선인운동 연구』, 『일본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강제연행사 연구』, 『재 일본조선인연맹 전체대회 연구』,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일상』, 『한국현 대사와 박물관』 등 다수가 있다. 필자 김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