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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3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영 등의 다른 구성원들과 1928년 4월 ‘춘경원공산 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국내의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1929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이로 인해 당시 소안도에서는 「 옥중가」 라는 창가가 면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신의주에서 체포 되어 감옥에 갇혀 있던 정남국을 기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소안학교 폐교 반대운동과 1930년대 정남국 일찍이 소안도에는 서당이 아동들의 교육을 담당 했다. 대체로 신식학교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서당이 유일한 보통 교육기관이었다. 1913년 신학문을 가 르치는 신교육기관으로서 사립중화학원이 비자리 에 설립되었다. 1922년 5월 1일 당국의 인가를 얻 어 1923년 5월 16일 개교했다. 1924년 10월 노농대 성회사건으로 송내호 등이 구속되자, 일제는 이 기 회에 소안학교를 공립학교로 만들어 버릴 음모를 꾸 며, 완도군수 김상덕이 교장 김경천에게 소안학교를 공립학교로 승격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교 장 김경천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일제는 소 안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 단하고, 아예 공립학교를 하나 새로이 세워 상급학 교에 진학하는 데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는 사립학 교인 소안학교를 눌러버릴 구상을 하게 되었다. 이 에 따라 결국 소안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당시 소안학교측은 복교(復校)문제에 대한 소안 면 민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복교찬성과 반대에 대한 서명을 받았다. 결국 일본 경찰의 혹독한 탄압은 촌 락 사이의 교통 차단과 주민 검거, 나아가 학생 검거 로 귀결되었다. 정남국은 소안에서의 명망성을 그대로 일본에 가 서도 유지하면서, 소안 출신의 구심적인 역할을 했 다. 그러한 모습은 소안학교 사건이 발생하자 보다 강화되었다. 일본의 각지에 있던 완도향우회들은 사립 소안학 교의 소식을 접하고, 조선총독부의 소안학교 폐교조 치에 대해 항의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정남국은 1927년 8월 초 복교동맹의 대표 자격으로 신간회 도쿄지회 대표 강소천과 함께 일본 정부 문부대신을 방문해 항의 문을 전달했다. 또한 같은 해 9월 귀국하여 완도군 수를 방문해 복교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을 방문해 복교조치를 촉구했 다. 하지만 11월에 발생한 배달청년회사건으로 다 수의 구성원이 구속되면서, 이 일도 제대로 진행되 지 못했다. 일본의 소안도 출신들은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지연에 기초하여 지원과 귀향 활동을 지속적 으로 전개했다. 일본노동농민당의 후루야 사다오(古 屋貞雄)와 신간회 도쿄지회의 강소천이 하의도사건 소안도에 복원된 사립 소안학교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