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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재일한인 독립운동사의 신조명 ④ 77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도쿄(東京) 서부지부 위원장 을 맡았다. 이 조직을 무대로 그는 같은 해 6월 1일 일본에서 40여 사회 단체의 후원으로 조선총독부의 정치를 공격하는 연설회를 개최해서, 소안학교 폐교 사건에 대한 진상을 보고했다. 1927년 10월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집행부 는 집행위원장 정남국 체제였다. 재일본조선노동총 동맹 집행부에는 일본부의 구성원으로 정남국, 강소 천, 박천, 남영우 등이 활동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 동맹 제4회 대회는 1928년 5월 13 · 14일 양일간 도 쿄제대(東京帝大) 셋츠루멘트 대강당에서 열렸다. 제 4회 대회는 원래 1928년 4월 27-29, 3일간 개최 예 정이었는데, 4월 21일 일본 경찰의 본부 습격과 28 일 집행위원장 정남국, 김계림, 권대형, 정희영, 송창 렴 등의 구속으로 연기되어 5월 13 · 14일에 개최되 었다. 제4회 대회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조직적인 준비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 선언과 운동방침을 채 택했다. 아울러 신간회(新幹會)를 통한 강력한 당의 필요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산업별 조직화, 일 본 노동자와의 공동투쟁을 강조하는 내용의 구 체성 을 담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4회 대회는 일상적인 활동을 소위원들의 보고를 통해 정리했다. 특히 오 사카사건에 대한 처리를 통해 파벌의 존재를 인정하 지 않는 조치를 취했다. 대회 둘째날에는 오사카사건 진상소위원회가 열 렸다. 오사카사건은 1928년 3월 28일 오사카(大阪)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회가 오사카조선노동조합의 김수현에게 도난(東南)지부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무 시하고, 하부조직인 도호쿠(東北)지부 상임집행위원 회에 새로이 취임한 김광을 제명하기로 결정한 데에 서 시작된 일련의 내부투쟁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 공산당 일본총국의 지도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중앙에서는 권대형을 파견하여 중재를 시도했다. 한편 1928년 3월 경성(京城)지방법원 검사국의 ‘제3차 조선공산당 고려청년회 사건 검거의 건’에 대 한 자료에 따르면, 정남국은 1927년 4월 5일 도쿄에 서 조직된 조선공산당 일본부 당원으로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던 정남국은 정창남, 위경 1927년 5월 7일 신간회 도쿄지회 창립대회가 열린 와세다대  스콧트홀(독립기념관 제공) 1930년대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의 장례식 모습(오사카인권박 물 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