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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3년 10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10월의 독립운동가 옥관빈은 일제 관헌과 내통하여 거액의 군용품을 기 부하고 반대급부의 지원을 받아 축재하였다. 그러면 서 독립운동을 비방하고 중국의 군사 · 정치까지 은밀 히 정탐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이에 김구 · 안공근 (安恭根) · 정화암 3자가 대좌하여 옥관빈 제거에 합의 하고 남한청맹에 실행을 맡기면서 엄순봉이 직접 거 사자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옥관빈이 종종 출입하 는 사촌형 옥성빈(玉成彬)의 집 맞은편 중국인 집 2 층에서 오면직이 열흘간 잠복하며 기다리다 8월 1일 밤 “드디어 출현했다”고 알려왔다. 그러자 엄순봉이 급거 출동하여, 사통(私通)을 행하고 후문으로 나오 는 옥관빈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1935년 봄에 벌어진 이용로(李容魯) 암살사건도 악성 친일분자 처단활동의 일환이었다. 이용로가 일 제의 끄나풀 조직과도 같은 재상해조선인거류민회 의 부회장이 되더니, 일본영사관과 결탁하여 재류 한인들 모두 민회에 가입토록 압박하고, 독립운동자 들의 거처와 동정 등을 낱낱이 영사관에 밀보한다 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정화암이 엄순봉 · 이달 · 이 용준에게 이용로 처단 응징을 역설하니 모두 찬동하 고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두 명이 실행키로 하 여 엄순봉이 자원하였고, 중국어에 능한 이규호(李圭 虎)에게 길 안내와 망보는 역할을 제의해 승낙 받았 다. 3월 25일 아침에 순양리 아지트를 나온 두 사람 은 공동조계 유신리로 갔다. 이규호는 민회 사무실 인근의 야채시장 광장에서 망을 보고, 엄순봉이 민 회 사무실 2층으로 돌입하여 취침 중인 이용로에게 권총 2발을 쏘아 뒷머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는 계 단을 뛰어 내려가려는데, 이용로의 아내 박성신(朴 聖信)과 처남 박숭복(朴崇福)이 붙잡아 식도로 내리 쳐 부상을 입히고 고성을 질러댔다. 겨우 뿌리친 엄 순봉이 큰길을 향해 내달렸으나, 고함소리에 달려온 중국 순경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용로는 그날 밤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영사관 경찰로 넘겨져 모진 심문을 받고 서울 로 압송된 엄순봉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거쳐 검사 국으로 송치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치안유지 법 위반 외의 다중 죄목으로 유죄 선고와 함께 사형 을 언도하였다. 즉시 항소했으나 복심법원에서 기각 되니 엄순봉은 관선변호사의 권고대로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하지만 상고 또한 기각되어 사형판결이 확정되었다.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엄순봉은 33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형장으로 나 가면서도 그는 당황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전혀 없었 다. 최후에는 의연히 “대한 만세”와 “무정부주의 만 세”를 삼창했다는 형리의 전언도 있었다. 정부는 엄 순봉 의사의 특출한 독립운동 행적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20~30년대 한인 의열투쟁의 의의 ‘의열(義烈)’이란 올바르다 여기는 것을 굳건히 지 켜내거나 맹렬히 추구함이다. 의열투쟁이란 그런 의 미를 띠면서 수행된 항일활동과 그 노선을 총칭하는 말이다. 올해 10월의 독립운동가는 죽음도 무릅쓰는 자기희생의 경지로 발을 들여놓아 의열의 불꽃을 크 게 피운 세 분이다. 1910년대 말 혹은 1920년대 중 반의 만주(중국 동북) 땅에서 청년으로서 독립운동 에 뛰어들었고, 얼마 후 중국 본토로 옮겨가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권력에 포박되어 험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