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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 이종암 · 엄순봉 · 이강훈 지사 65 큼 가세가 빈한했지만, 그늘 없 이 순박하면서도 의협심 강한 성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집안 농사일을 계속해서 돕고 짓다 가 18세쯤에 외가 친척의 서당 에 들어가 2년정도 수학하였다. 1925년 9월경에 압록강 너 머의 남만주로 건너갔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농장에 고용 되어 일하곤 했다. 그러다 백두 산 밑 안도현에 이르렀을 때 한 인학교 교원인 이강훈을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장을 받아 북 만주의 해림(海林)으로 갔다. 거 기서 신민부에 들어가 활동하 기 시작했는데, 군사위원장 김 좌진이 엄순봉의 인품과 도량 에 감탄하여 청년참모의 일원 으로 대우하고 아꼈다. 그 뒤 엄순봉은 만주를 먼저 떠난 백정기 · 정화암(鄭華岩) 등 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을 뒤좇아 1931년 10월 남쪽 을 향해 떠났다. 상해로 간 그는 외곽지 남당(南塘)에 정착하고 생활기반을 잡아갔다. 그러면서 인근 남 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인 류자명과 교 유하고, 그의 인도를 통해 아나키즘 이론을 깊이 학 습하고 수용해 갔다. 그가 이해한 아나키즘의 주지 는 개인의 자유가 절대로 존중됨과 아울러 사회정의 도 이루어지도록 모든 계급질서를 타파하고 민중의 자유연합 사회를 건설하자 함이었다. 그런 연관에서 엄순봉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이하 ‘남한청맹’)과 항일 구국연맹(흑색공포단)에 기꺼이 가입하였다. 1933년 3월 초 이강훈 등의‘육삼정 의거’가 실패로 끝난 뒤 남한청맹은 상해 한인사회 내부의 적인 악 성 친일분자와 직업적 밀정, 사리사욕에 눈먼 밀고 자 등을 처단, 척결하는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그 시범사례가 된 것이 1933년 8월 1일의 옥관 빈(玉觀彬) 저격 처단이었다. 상해지역의 재계 · 언론 계 · 불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된 실업가로서 1920년대 상해 일본 총영사관 상해 황포탄 부두 전경(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