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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이재유(李載裕) 선생 57 동운동에 흥미를 갖고 전국무산자평의회, 도 쿄합동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했다. 또 재일 본조선노동총동맹, 도쿄조선노동조합, 재도 쿄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도쿄지회 등의 위 원으로 조선인 노동단체와 사상단체 등에서 일했다. 이와 함께 1927년 후반기 이후 비합법운 동에 참여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 산청년회 일본총국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요(要)시찰인’으로 편입되고 곧 이어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검거 되어, 조선으로 호송되었다. 3년 동안의 도쿄 생활에서 경찰서에 검거된 횟수만도 무려 70 여 차례에 이르렀다. 1930년 11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6월을 선고받아 1932년 12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이듬해 8 월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 카’를 조직하여 조선일보사를 통 한 언론활동, 공장중심 노동조합 조직, 지방별 농민조합 조직, 독 서회를 통한 학생운동 지도 등 부 문별 운동을 통해 반제국주의 독 립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활발 한 활동을 펼쳤다. 이현상(李鉉 相)·김삼룡(金三龍)·변홍대(卞洪 大)·안병춘(安炳春)·이종희(李鍾 嬉)·이순금(李順今) 등과 함께 서 울 지역을 중심으로 대중적 노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4년 1월 21일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당하여 취조를 받았다. 하지만 4월 14일 간수가 순시하던 틈을 이용해 탈옥하여 경성 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미야케(三宅鹿之助) 집에 숨어 있었다. 이후 박진홍(朴鎭洪)·이관 술(李觀述)·박영출(朴英出) 등과 함께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과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35년 5월에는 양주군 노해면(蘆海面) 창 동리(일설에는 공덕리)에 농부로 위장 정착 해 이관술과 함께 『적기(赤旗)』를 발행하는 등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36년 12월 25에 다시 체포되었다. 예심과 3차례의 공판을 거 쳐 1938년 7월에 소위 치안유지법·출판법 위 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 에서 복역하였다. 옥중에서도 조선어사용금지반대, 수감자 1930년 11월 서대문형무소 수감시 이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