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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을 시작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아래를 내려다보 며 이 전투를 전사할 자리라고 각오하고 혈전을 전 개하였다. 오전 내내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되었으나,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반복해 기어올라오는 일본군 의 돌격전을 좌절시켰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오후 에도 혈전을 전개하는 중에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 군 연합부대가 우측 다른 고지에 찾아와 지원 전투를 해주는 도움을 받았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나 홍 범도 연합부대의 독립군이나 모두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정확 하게 총을 겨누었다. 일본군은 3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내고 공격이 둔화되었지만, 병력과 화력이 우세하므로 단념하지 않고 오후 내내 공격 을 되풀이하였다. 결국 해가 져서 어둠이 내리자 어 랑촌전투는 종결되었다. 일본군은 여전히 고지를 점 령하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독립군이 승리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청산리독립전쟁이후 김좌진의 행로와 역사적 위상 ① 이만에서 동녕으로 회귀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북로 군정서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고 독립군을 통합하 기 위해 중 · 소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은 이만전투로 널 리 알려진 곳으로, 당시 일본군 점령 하에 있지 않은 철도역이었으므로, 독립군의 통합장소인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하기 편한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김좌 진은 이곳에서 독립군의 통합장소인 자유시로 이동 하지 않았다. 볼세비키측에서 일본군과의 충돌 우 려, 시베리아대륙을 무장한 채로 이동했던 체코군 의 반란 등을 고려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 었다. 결국 북로군정서군 중 박영희(박두희)를 중심 으로 한 일부만 자유시로 이동하고, 김좌진은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東寧縣) 일대에서 독립군 조직을 재정비하고, 1925년 북만주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했다. ② 역사적 위상 김좌진의 항일운동은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첫번째는 국내에서의 애국계몽운동시기 이다. 김좌진은 향리에 호명학교를 세워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으며, 기호흥학회 등에도 가입하여 계 몽운동을 통한 국권의 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시기로 서 독립운동기지설치를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과 대 한광복회에서의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세번째 시기 는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 던 시기이다. 길림군정사,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단, 신민부, 한족총연합회 등에서의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즉 김좌진의 항일운동은 국내에서의 애국 계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 그리고 국외에서의 무 장활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김좌진의 사상 역시 세번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 다. 구한말과 1910년대 전반기까지는 전통적인 유 학의 바탕 위에 근대적인 사상이 가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후반 까지는 대종교적 민족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 는 계급보다는 민족을 강조했고, 단군을 정점으로 배달만족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