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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자유시참변 전후 최진동과 홍범도의 항일운동 그러나 북로독군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봉오동 전 투 이후 북로독군부의 최진동은 홍범도와의 지휘권 의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국민회의 구춘선과는 조직 운영 등의 문제로 충돌하면서 결국, 1920년 8 월 초 북로독군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하지만 봉오 동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에게 독립군단체 통합의 필 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했다. 반면 일본군에는 독립 군 세력의 확장을 끊어놓고자 ‘간도지방 불령선인(不 逞鮮人) 초토(토벌)계획’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일어난 전투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산리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은 대대적인 승전고를 울 렸지만, 전투가 지속될수록 일본 정규군과의 전면전 은 독립군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동안 독립군을 지원했던 간도 한인사회 마저 극심 한 참변을 겪게 되자, 독립군의 주요 지도부는 재기를 도모하며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로의 이동을 결정하 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령에 도착하기 전에도 독립군의 통합운동 은 계속되었다. 청산리 전투 이전에 이미 왕청현 나 자구(羅子溝)로 병력을 이동했던 최진동은 대한공의 단, 대한광복단, 대한의군부, 대한의사부 등과 통합 하여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를 결성했다. 다른 한 편에서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일의 북로군정서 (대한군정서), 그리고 이청천의 서로군정서가 합쳐 제2차 삼단연합인 ‘통의부’를 결성하였다. 최진동은 일군의 독립군부대와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 에서 그간 영안현(寧安縣) 지사와 쌓아둔 친밀한 관 계를 이용해 독립군에 대한 식량을 지원받는가 하 면, 중국 관헌으로부터 독립군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1921년 6월 초 최진동의 대한총군부를 선두로, 안 신민단 사령관 박승길이 그린 봉오동 전투도(출처; 『봉오동·청산 리 독립전쟁 자료집』). 일본군(붉은 선)이 독립군에 완전히 포위 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에 세워진 봉오동전투 기념비(출처: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