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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최진동의 독립운동과 군무도독부 41 1920년대 초 북간도 지역이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로 부상한 배경 에는 이주 한인들의 피땀 어린 노 력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들 역시  10여 년에 걸쳐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한 결과, 1919년 3.1 운동 전후로 북간도에는 50여 개의  독립운동단체가 설립되는 등 북간 도는 무장투쟁에 가장 적합한 기지 로 성장해있었다. 우리가 최진동과  홍범도를 장군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자 신의 가족과 전 재산, 그리고 귀중 한 목숨을 오로지 독립을 위해 공헌 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의 생계 와 그들의 안위까지 돌보는 지휘관 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다했기 때문 이다. 1920년대 초 북간도의 상황 1920년대 초 ‘항일무장투쟁’ 중심지역은 오늘날 중국의 가장 동북쪽 에 위치한, 당시에는 ‘간도’라고 명명했던 곳이다. 간도는 백두산의 동북 쪽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을 말한다. 백두산 서남 쪽 압록강 대안 지역은 서간도라고 불렀다. 간도는 역사적으로는 단군조선 이래 고구려와 발해에 이르는 한민족의 고토(故土)이며 민족 문화의 중요한 터전이었다. 1920년대 초 북간도 지역이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로 부상한 배 경에는 이주 한인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10년 전후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피해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척 박한 간도 땅을 개간하고 각 지역마다 학교를 세우며 한인사회를 만들 었다. 이들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들 역시 10여 년에 걸쳐 민족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한 결과, 1919년 3.1운동 전후로 간도에는 50여 개 의 독립운동단체가 설립되는 등 간도는 무장투쟁에 최적의 기지로 성 장해있었다. 이 단체들이 수차례의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상해(上海) 임 시정부와 연결된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 서일), 대한국민회(구춘 선), 대한군무도독부(최진동), 대한의민단, 대한신민단 등으로 자리를 잡았고, 기타 광복단 등이 주요 독립군 단체로 성장했다. 그리고 1919 년 가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간도의 독립군 과 합세하면서 간도지역은 기실 항일무장투쟁의 최적지로 부상했다. 최진동과 대한군무도독부의 활동 부친 최우삼을 따라 중국 땅에서 성장한 최진동(일명 최명록, 1883~1941)은 어려서 중국인 대지주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최진동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왕청현(汪淸縣) 토지관 통역관에 임용되었고, 한인 들의 토지 매입 중개자로도 활동하면서 봉오동(鳳梧洞) 일대의 넓은 토 지를 사들여 터전을 일구었다. 1907년경에는 중국 보위단에 입대하여 활동하였고, 1909년 용연(龍淵) 김정규(金鼎圭)에게서 의병 모집과 의 병들의 숙식 제공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봉오동은 독 립운동의 근거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