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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밀리에 ‘군정부(軍政府)’ 또는 ‘독립군부(獨立軍府)’를 조직했는데, 주요 집행간부로는 독립군 총사령관에 홍범도, 지휘관에 이용(李鏞), 접제원(接濟員)에 최병 준·황원호, 군자금 모집에 오주혁·박군부, 주계(主計) 에 김립·이중집 등이 선임되었다. 군정부는 홍범도 에게 조선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북간도로 가서 독 립군을 지휘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그러자 홍범도는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밀산을 떠 나 추풍 당어재골 최병준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하 여 최병준의 집에 은닉해 두었던 무기를 꺼내고, 의 병을 모집하고 총탄, 의복, 천리경 등 군수품을 준비 하여 무장 대오를 갖추었다. 그러나 홍범도는 연해 주와 만주의 상황이 불확실한 가운데 아직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당분간 당 어재골의 최병준 집에 머무르면서 무장투쟁 개시의 시기를 가늠하기로 결정했다. 최병준의 집에 머무르던 홍범도는 1919년 10월 1 일 결전의 시기가 왔다고 최종 판단을 내리고 마침 내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했다. 1910년 4~5월 국내 진공작전 실패 이후 철저하게 의병운동을 준비해 온 지 9년 만이었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의병(독립군)’ 106명을 이끌고 혼춘의 초모정자(草帽頂子)로 들어 갔다가 습격해 오는 마적 70명을 처치하고, 총과 탄 약 등 전리품을 획득한 후 나자구 한인촌으로 이동 하여 주둔했다. 이렇게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을 뒷받침한 최병 준은 홍범도가 출격한 지 얼마 안 되어 비극적 최후 를 맞게 되었다. 1919년 늦은 가을 어느 날 밤, 홍범 도의 차남 홍용환과 최병준의 차남 최찬식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수상한 이들을 발견하고 일탐(日探, 일 본 밀정)이라고 판단하여 암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후 재피구(梓皮構) 앵데기(추풍 지방에 있었던 한 인 마을 혹은 언덕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됨)에 근거 를 둔 이범윤 부대에서는 암살당한 두 사람이 자기 부대원이라며 홍용환과 최찬식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 흥개호(興凱湖·러시아 한카호) 동쪽 밀산부 봉밀산 아래 황무지를 개척한 ‘한흥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280㎞ 떨어진 곳으로 지금은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쾌상별이(당벽진) 백포자향 임호촌이다. 당시엔 ‘고려영’으로도 불렸다(영남일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