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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10년 6월 21일 유인석(柳麟 錫, 1842~1915)의 주도하에 13도의군(十三道義軍) 이 창설될 때 도총소(都總所) 의원(議員)으로 선임되 었다. 홍범도는 총기를 사들이고 의병을 모집하여 8 월 하순에 국내 진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3도의 군의 국내진공이 미처 개시되기 전에 일제는 한국을 강제합병하였으며,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 성명회(聲 明會) 및 13도의군 간부들을 체포하고 조직을 해체 시켜버렸다. 이에 홍범도는 홀로 다시 의병운동을 전개하여 1910년 말경 70여 명의 부하와 3천 원의 군자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의병 조직의 수준이 아직 열악했 고, 러시아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연해주에서의 활 동에 제약이 많았으므로 당장 국내 진공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그에 따라 장기전을 대비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우게 되었는데, 일단 힘들게 모집한 의병 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의식(衣食)을 해결해 줄 필요 가 있었다. 그리하여 홍범도는 혼춘 신풍촌에서 자신의 아들 을 키우며 거주하고 있는 부하 최병준에게 연락을 취하여 2천 원을 주며 의병부대원들을 잘 돌봐달라 고 부탁했다. 최병준은 두만강에서 가까워 진공작전 을 펴기에도 좋고, 러시아 정부의 압력도 미치지 않 는 혼춘 태평구(太平溝) 부근에 토지와 빈집을 구매 하여 의병들의 생활 공간을 마련했다. 홍범도의 연해주 생활 - 최병준의 혼춘 생활 (1911~1915) 최병준은 이후 혼춘 토문자(土門子)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1915년까지 머물렀다. 당시에 최병준은 기 본적으로는 자신의 두 아들과 홍범도의 아들 용환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한편, 홍범도가 보낸 의병부대원 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 당했다. 또한 황병길(黃丙吉), 오병묵(吳丙默), 김병겸 (金丙謙), 장봉한(張鳳翰) 등 뜻이 맞는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고 지내며, 남별리(南別里) 춘동(春東)학교에 서 항일 사상을 갖춘 인력을 양성하는 일에 절치부 심했다. 또한 혼춘 지역 조선인 기독교우회(基督敎友 會)의 교제과원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 로 항일의식을 불어 넣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이 시기에 홍범도는 연해주 각 지역을 돌며 군자금 마련에 온 힘을 쏟았는데 자금 조달 방식에 있어서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이전에는 뜻있 는 한인들을 설득하여 모금을 통해 자금을 마련한 반면, 이 시기부터는 본인이 직접 노동하여 자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두, 금광, 어장 등지에 서 노동자로 막일을 하며 그야말로 ‘피땀 흘려’ 착실 하게 돈을 모았다. 그런데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이후 러시 아와 일본이 같은 협상국에 속하게 됨에 따라 상황 이 매우 어렵게 돌아갔다. 이에 홍범도는 잠시 아무 르강 유역으로 피신하여 금광 등지에서 일을 하며 돈을 더 모은 후, 그동안 모은 돈 3,050루블을 가지 고 이만(Iman)으로 나와서 5연발 총 17정과 탄환 1,700발을 구입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일제 가 러시아 정부에 홍범도 등 한인 항일지도자들을 체포할 것을 요청하게 되자,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 와 의병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판 단 하에 홍범도는 1915년 연해주를 떠나 의병들과 함께 만주의 밀산(密山)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