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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북간도 · 연해주 항일무장투쟁의 설계자, 홍범도와 최병준 33 홍범도와 최병준은 1911년 이후 중 장기적 시각에서 의병(독립군)운동을  이끌어 가기 위해 나름의 규칙을 만 들고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약 9년 에 걸쳐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은 역할 분담을 해가며, 군자금을 마 련하기도 하고, 무기를 구입, 은닉하 기도 했다. 의용병(독립군) 부대원을  모집 · 육성 · 훈련하고, 이들에게 숙식 과 편의를 제공하는 일에 혼신의 힘 을 다했다. 그리하여 혼춘의 태평구,  밀산의 한흥동, 추풍의 당어재골이라 는 독립군 ‘인큐베이터’ 공간을 확보 했다. 1910년대 최병준과 홍범도는  지속가능한 무장독립투쟁의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1920년대 독립전쟁의  기본적 틀을 마련한 설계자이자 독립 군을 길러낸 산파로서의 역할을 수행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 이전에 홍범도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홍범도(洪範圖, 1868~1943). 한국 사람이라면, 또 한국 독립운동사 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홍범도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독립군 대장으로 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의 통쾌한 승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1920년에 있었다. 그것은 홍범도가 한 해 전인 1919년 10월에 본격적으로 독립군 무장투쟁을 개시했기 때문 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 홍범도가 의병들과 함께 마지막 으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인 것은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4~5월 경이었다. 그렇다면 그사이의 시기, 즉 1910년부터 1919년 사이에 홍 범도는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범도는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를 무대로 하여 무려 10년에 걸쳐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 기 홍범도의 삶과 활동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은 바로 최병준 (?~1919) 1) 이라는 인물이다.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최병준은 홍 범도가 가장 신뢰했던 부하이자 동지였다. 홍범도와 최병준이 활동했 던 1910년대 연해주와 북간도로 떠나 보자. 홍범도의 연해주 망명 (1909) 1907년 8월 군대 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여감에 따 라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통해 포수들의 총기를 압수하는 조 치를 취했다. 이에 홍범도는 1907년 10월 일진회 회원들과 일본군을 처단하며 포수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리하여 1908년 상반기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워 번번이 승리 하며 일본군 수백 명을 죽이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일진회를 이용한 귀순공작과 끈질긴 추격 작전과 대공세를 벌임으로써 홍범도 의병을 와해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홍 1) 그의 한자 이름은 기록에 따라 崔丙俊, 崔炳俊, 崔秉俊의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따라 1870, 1874, 1875년 중 한 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