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page

Special theme • 홍범도를 도운 동지들 - 차도선 · 박경철 · 이병채 29 는 마을에 서당식 학교를 만들고, 마을 어린이 10여 명을 가르치며 항일 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결국 1939년 2월 8일, 만 7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 을 마감했다. 차도선의 남만주 망명과 가족들의 독립운동 1908년에도 홍범도 의병부대는 함경남도 홍원군 일대에서 한 때 유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 다. 그러나 1908년 말 결국 홍범도 의병부대는 식량 과 탄약 부족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후일 을 기약하고 부득히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 8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자 차도선 은 남만주 서간도지역으로 망명하여 포수단(砲手團) 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길림성(吉林省) 송화강(松花江) 변의 무송현 일대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39년 2월 8일 서거할 때까지 초지일관하 여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1910~20년대 만주 독립 운동 당시 ‘차천리(車千里)’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차도선 가족들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떨쳐 나 섰다. 형 차도심은 대장간을 운영하며 의병부대에 무 기를 공급했다. 큰아들 차리덕은 아버지와 함께 의병대원으로 활 동했고, 둘째 아들 차운학은 만주에서 지하항일투 쟁에 투신했다가 일제 당국에 체포되었고, 1945년 8 · 15 해방을 넉달 앞두고 총살되고 말았다. 셋째 아 들 차원복 역시 지하운동에 가담하여 무기징역을 선 고받았다. 손자들 역시 독립군 부대와 중국공산당 계 열의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차도선은 1938년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만주 (중국 동북)에 설치한 집단부락에 강제로 수용되었는 데, 이듬해 2월 임종할 때가 되자 “죽어서도 일 본 놈 이 보기 싫으니 내가 살던 두지동에 묻어 달라”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따라 차도선의 묘소는 무송현 중심가에서 백여리나 떨어진 심산유곡 두지 동의 옛 집터에 만들어졌다(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하, 장산, 1996, 181쪽).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 다. 그러나 직계 가족 모두가 중국에 거주하고 있어 훈장은 전달되지 못했고, 국가보훈처가 보관했던 훈 장은 2003년 6월 손녀 차월겸(당시 63세)에 전달됐 다. 정부는 지난 1995년 중국 무송현 두지동 옛집 타 작마당에 묻혀 있던 유해를 대전국립현충원에 모셔 와 안장했다. 대한독립군 ‘유고문’에 보이는 참모 박경철과 이병채 1900년대 초~1920년대 전반기 홍범도가 대한민 국 원년(1919년) 12월 발표한 ‘유고문(喩告文)’은 만 주 독립운동 세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유고문은 북간도 (현재 중국 연변) 지역 동포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홍범도는 이 유고문에서 일제와 결전을 벌여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 싶지만,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차도선의 묘(오마이뉴스 조호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