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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23년 10월 Special Theme   홍범도 장군 서거 80주년 특집 홍범도와 그의 동지들 의병이 6백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 후 차도선 의병부대는 홍범도 의병부대와 힘을 합쳐 함경도 일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여 1908년 2 월 경까지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 귀순공작에 속은 차도선… 탈출 후 홍범도 의병부대 합류 차도선-홍범도 의병부대는 봉기한 이후 3개월 동 안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큰 타격 을 주었다. 일본군은 이에 1908년 2월부터 3월까지 의병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고, 의병들이 산에서 내려 오면 식량을 제공한다는 등 선무공작과 투항 · 귀순공 작을 펼쳤다. 당시 의병부대는 점차 탄약이 떨어지고 심한 추위 와 식량난에 처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차 도선 · 홍범도 등이 1908년 3월 12일 중국 길림성(吉 林省) 임강현장(臨江縣長)에게 보낸 공함(공식 편지) 에는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총대 장 직책인 모사장(謀事將) 박충보(朴忠保)와 도대장 (都大將) 차도선, 부대장 홍범도 명의로 보낸 공함(公 函)의 주요 내용을 보면 “청한(淸韓) 양국은 입술과 이 빨의 관계로서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듯, 어찌 수수방관만 하겠는가. (중략) 1 · 2인의 의사가 작은 의 리를 내세워 창의했지만, 무기가 낙후하고 병사들의 훈련 또한 매우 부족한 편이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 고 있다. (중략) 무기 천자루를 특별히 허락해주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무기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1908년 봄 춘궁기에 식량난과 무기 등의 부 족으로 곤경에 처하자 차도선은 홍범도의 반대를 무 릅쓰고 일제의 회유책을 역이용해 엄중한 위기를 넘 기겠다는 계산으로 휴전을 제안했다. 차도선은 이를 담판 짓기 위해 1908년 3월 7일 25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 오쿠무라(奧村) 중위를 만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약속을 어기고 의병들을 무장해제했으며, 이에 저항하는 좌대장(左大將) 태양욱(太陽旭)을 사살 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홍범도를 유인하기 위해 차도선을 감금했다. 그러나 2개월이 넘도록 갑산헌병분견소 에 갇혀 있던 차도선은 마침내 5월 7일 탈출해 홍범 도 부대에 다시 합류했다. 홍범도는 한 때의 잘못을 반성하며 백의종군하겠다는 차도선을 기꺼이 받아 들였고, 차도선은 도대장이 아닌 의병 자격으로 홍범 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차도선의 탈출은 가족들에게 비극이 되고 말았다. 일본군이 차도선의 집으로 쫓아와 집에 불을 지르고, 차도선의 아내와 친형 차도심(車道心)을 고문하며 추 궁했다. 하지만 만주로 이주한 뒤에도 차도선은 항 일투쟁을 줄기차게 이어갔다. 1920년대 이후 나이 가 들어 더 이상 앞에 나서기 어려워지자 자신이 사 차도선 홍범도 의병부대가 중국 임강현장에게 무기공급을 요청 하기 위해 1908년 2월 보낸 공함(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