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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2023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것은 1958년이었다. 그는 1970 년 4월 12일 81세로 별세할 때까 지 줄곧 한국에서 살았다. 그는 국 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유일한 외국인이 기도 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인물로 통한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입구는 독립 유공자 유일한(1895-1971)이 만 든 유한양행이 1932년부터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24년 4월에 결 성하여 1931년 5월까지 존속했 던 청년운동의 전국적 결집체 조 선청년총동맹도 출범 이후 한동 안 서대문(현 돈의문박물관마을 전시관 아지오 자리)에 사무실(조 선청년총동맹청년회관)을 두고 있었다. 청총은 이후 시내 견지동 으로 이전하였다. 베델집터와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이 있는 홍파동 2 번지 일대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 배설)의 집이 있던 곳이다. 베델은 1905년 11월 27 일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장지연 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영문으로 번역한 글 을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호외 로 발행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에 대한 기사를 『대한매일 신보』에 상세히 실었다. 이로 인 해 일본영사관의 항의를 받은 주 한영국영사관에서 두 차례 재판 도 받고 중국 상하이 영국영사관 에서 옥살이까지 했다. 1920년대 후반 이 지역이 주택지로 개발되 면서 지번이 분할되었고, 지금의 홍난파 가옥도 그 중 한 곳에 지어 졌다. 그럼에도 베델집터 표지판 은 홍난파 가옥 위 공원에 설치되 어 있어 마치 양자가 무관한 듯이 배치되어 있다. 홍난파 가옥은 천재 음악가 홍난파(1898~1941)가 1934 년 두 번째 부인 이대형(李大亨, 1913~2004)과 재혼한 이후 세상 을 뜰 때까지 약 6년 동안 거처로 삼았던 집이다. 조선에 대한 자부 심이 강했던 홍난파는 1937년 ‘동 우회사건’을 계기로 ‘사상전향 성 명’과 함께 친일의 길을 걸었다. 홍난파 이전에도 이 집에는 신 채호 선생의 조카 신수옥(남편 홍 어길), 철학박사이자 독립유공자 한치진(1901-1955)이 살았다. 이 러한 사정까지 고려한다면 서울 시가 이 집을 ‘홍난파 가옥’이라 이 ➒ ➓ ➒  돈의문박물관마을 아지 오에 전시되어있는 유한양 행과 유일한 이야기   ➓  홍난파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