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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3년 10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① 명기념회관이 건립되어 4 · 19혁명 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건물 로비에는 4 · 19혁명의 역사가 전 시되어 있다. 6 · 10만세운동의 주역 박두종· 박하균의 하숙터 4 · 19혁명기념회관 앞은 1926 년 6 · 10만세운동의 주역 박두종· 박하균의 하숙집(죽첨정 1정목 36-16 김흥순 방)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6 · 10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병립, 이천진, 박두종, 박하균, 이선호를 비롯하여 각 학교 대표 40명이 회 동(5월 20일)한 평동계의 거점이 었다. 평동계는 격문 1만 매를 인 쇄한 곳이 사직동 이석훈의 하숙 집이었던 탓에 사직동계로 부르 기도 한다. 6 · 10만세운동은 원래 조선공산 당과 천도교 구파가 주축이 되어 광범위한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한 다는 전망을 가지고 준비했다. 그 러나 권오설, 곽래원, 민창식 등이 직전에 일경에 체포되는 바람에 거사 당일에는 평동계와 사립고 보 학생 중심의 통동계가 주축이 되어, 종로3가에서 창신동과 신설 동에 이르기까지 만세운동을 주 도했다. 안창남 생가터, 안재홍 집터, 박진홍 집터도 이 일대에 서대문 주변은 박두종과 박하 균 만이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가 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한국인 최초로 한반도 상공을 비행기로 난 안창남(1900-1930) 은 평동에서 태어나 미동보통학 교를 졸업한 인물이다. 그는 1922 년 12월 10일 벌어진 ‘안창남 모 국방문 대비행회’ 당시 여의도비 행장을 이륙하여 서울 시내를 비 행할 때 자신이 태어난 집을 지나 여러 독립운동가가 갇혀 있는 서 대문형무소 위까지 비행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박진홍 (1914-?)이 1934년 1월 22일 체 포되었을 때 그의 주소지도 인근 송월동(94-2)이었다. 동덕여고보 에 다니다 맹휴를 조직하여 제적 된 박진홍은 이후 혁명적 노동운 동에 뛰어들었다. 서대문로터리 건너편 냉동(냉천동)에 있던 대창 직물도 그가 다닌 공장 중 하나였 ➎ ➏ ➎  6 · 10만세운동의 재판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1926.11.4.). 박두종과 박하균의 사진도 실려있다.  ➏  일제강점기 언론에 보도된 안창남 · 안재홍 · 박진홍(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