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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95회) • 평택의 만세시위 (2) 103 송탄면과 오성면, 포승면 4월 2일 진위군 송탄면 독곡리에서 약 500명이 만 세시위를 벌였다. 조선헌병대사령관(兒島惣 次郞)의 보고에 의하면, “경관이 발포하여 사망자 1명, 부상자 2명이 발생”했다. 4월 2일 오성면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인 4월 3일 밤, 오성면 학현리의 서당훈장 김용성(金 容成)과 공재록(孔在祿), 이사필(李思弼) 등은 마을 주 민들을 안솔하여 마을의 봉오산 위에 올라가 화톳불 을 피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 12~13명이 참여했다. 3월 중 어느날 진위군 포승면 희곡리의 이민백(李 敏百) 집으로 진위군 북면 가곡리의 21살 권익수(權 益洙)는 찾아와서 말했다. “나는 경성에 사는 권익수라는 학생인데, 어디서나 지금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데 수 원군과 진위군만은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므로, 기 일은 곧 통지할 터이니 그때 마을 사람들을 지휘하여 만세를 부르자.” 포승면 만세시위는 확인되지 않으나, 서울 학생들이 지방으로 만세시위를 전파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진위군이었던 평택지역에서는 1919년 4월 1 일을 전후하여 3,000명의 병남면 시위, 수백에서 수 십 명 규모의 북면, 고덕면, 청북면, 서탄면, 송탄면과 오성면 등지의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특히 고덕면과 서탄면에서는 주모자를 검거하러 출동한 일본 군경 에 집단저항을 했으며, 고덕에서는 일제의 발포로 6, 7명이 목숨을 잃었고, 60여 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벌 어졌다는 것에서 이 지역 주민들이 가진 뜨거운 저항 정신을 볼 수 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 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을 역임했고, 현재 3 ٠ 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진위군 오성면 만세시위자 안육만 평택 옛 진위군 청사(1914년)오성면 학현리 만세시위자 김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