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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컬럼 •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국내외 자유수호자들의 삶을 되돌이켜 본다 9 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이국 땅을 선택했다는 구절에서도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이 새롭게 관심을 받던 시 점이던 7월 27일에, 6 · 25전쟁 국군전사자 유 해 7위가 73년 만에 특별수송기 편으로 고국에 도착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그들은 전쟁 당 시 및 이후 미군이 수습해 하와이에 보관하고 있었던 유해와 북한이 1990~1994년에 발굴해 미국으로 송환한 유해 등으로 한미 공동감식을 통해 국군전사자로 판단됐다. 태극기로 덮은 작은 관에 담긴 유해를 감싸 안은 군장병과 유 가족이 트랩 아래로 한 걸음씩 내딛자 국빈급 예우로 예포 21발이 발사됐고, 군악대는 애국 가로 고인의 영령을 위로했다. 같은 시점에,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및 참 전용사 후손, 그리고 시민 등 4천여 명이 6 · 25 전쟁 직후 미군이 처음 도착한 부산 수영비행 장 자리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다시 『동 아일보』 보도 (2023년 7월 27일 A6면)에 따르 면, 그들 가운데 참전용사 13명은 거의 모두 90 대의 노인이어서 지팡이를 짚거나 가족들의 부 축을 받으며 힘겹게 단상에 올랐다. 감사와 감 격의 의미에서, 눈물겨운 장면이었다고 하겠다. 논란이 컸던 새만큼 잼버리대회에 관한 기사 도 눈길을 끈다. 영국 스카우트 대원들이 야영 지를 떠난 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의 영국군 전투추모공원을 방문하고 추모의 벽에 새겨진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쓸어 내리며 읽었다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다섯 젊 은이는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었다. 이 무렵 제정러시아, 이어 소련의 연해주에 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하던 애국자 최재형 선생의 부인 최엘레나 여사의 유해가 사후 71년 만에 한국으로 봉환됐다. 최재형 선 생이 1920년 4월에 일본군에 체포된 뒤 탈주 를 시도하다 총격을 받고 순국하자 최여사는 자녀들과 함께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1922년 에는 자본가 가족이었다는 이유로 그때로서는 소련에 속한 키르기스스탄으로 유배를 가야 했 고, 1952년에 별세하자 키르기스스탄 비슈케 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렇게 부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면서, 최선생 고택 뒤편 언덕에 서 러시아 우스리스크의 한 언덕에서 채취한 흙 역시 가져왔다. 그리고 8월 14일에 이 흙과 부산 유엔기념공원 전경(동아일보 제공) 유엔군 참전용사 사후안장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그림(2023 년 7월 26일 A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