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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⑦ 89 익을 취하니, 법 중의 좋은 것이 무엇이 이보다 낫겠 는가? 위문후(魏文侯)는 이회(李悝 )의 말을 채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고, 한(漢) 선제(宣帝)는 수창(壽 昌)의 진언에 말미암아 백성을 풍족하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에는 일찍이 양경(兩京=개경과 서경)과 12목(牧)에서 조적(糶 糴)을 시행한 적이 있었 으며, 본조(本朝=조선, 필자 주)의 『경국대전』에도 경 외(京外)에 모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게 하였으 나, 필경에는 경성 이외에는 한 개의 고을에서도 시 행한 곳이 없었다. 아! 나라가 수척하고 백성이 가난 하게 된 데에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만약 서울과 주현(州縣)에 모두 하나의 창(倉)을 두 고 법에 의거하여 조적을 시행한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부강해지는 효험을 거둘 것이다. 사창(社倉) 제 도와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이미 주자(朱子)의 사목 (事目)이 있다. 다만 채택하여 조처할 때 변통의 묘리 에 적합한 것은 토속을 참고하고 시의를 따라 규칙을 세우는 것도 또한 무방할 것이다. 요약컨대 주현은 반드시 상평창을 설치하고 향사(鄕社)는 사창을 세우 는 것이 필수이니, 이 두 가지 법이 아울러 거행된 뒤 에야 바야흐로 진선진미가 될 것이다. 15일 비서장이 출발하여 돌아가시는데 마을 밖까지 전송하였다. 22일 비서장이 오언고시(五言古詩) 한 편을 보 내셨기에 차운하여 드리다. 오늘 읽은 석주의 망명일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점 은 손위 처남 김대락과의 정치에 대한 수준 높은 논 의들이다. 이들은 ‘토지제도’를 논의하였고, ‘호적제 도’를 논의하였으며, 요즘 용어로 ‘복지’와 관련된 사 안들에 대하여 깊은 논의를 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석주가 제기한 문제들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곡식이 있은 뒤에 나라의 재용이 갖추어지고, 토 지가 잘 분변된 뒤에 백성의 식생이 풍족해진다.  … 지금에 이르러 온갖 폐단을 일으키는 까닭은,  그 제도를 제정할 때 … 토지의 면적이 들쭉날쭉 하여 고르지 않은 데 근원한다. 이에 간사한 서 리배들이 그 고르지 못한 면적을 빌미로 농간을  부리고 이리저리 고쳐 누락시키거나 속여 숨기 는 폐단이 생기니, 드디어 법제가 허물어지게 된  1910년대 중반 남만주 서간도지역 백서농장의 농사  경학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유하현 삼원포. 이상룡 · 김대락이 활동 했 던 곳이다(박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