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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3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시론 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 더욱 고조되었는데, 이 때 에는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이라는 절체절명의 움직 임으로 이어졌다. 1905년에 보성학교(이용익) · 양정의숙(엄귀비)이 설립되었고, 그 이듬해에 휘문의숙(민영휘) · 진명여 학교(엄귀비) · 숙명여학교(엄귀비) · 중동학교(신규 식) 등이 뒤를 이었다. 이 무렵에 도산(島山)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 여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梁起鐸)과의 만남 을 가지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단체의 필요성 에 교감하였다. 이로써, 이회영 · 전덕기 · 주진수 · 이 갑 · 이승훈 · 안태국 · 이동녕 · 이시영 · 신채호 · 류동 열 · 김구 등이 참여하여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 다. 이 때가 1907년(고종 44년) 4월이었다. 신민회는 ‘새로운 국민 · 새로운 민족’으로 다 시 태 어나자는 뜻의 신민(新民)의 꿈을 잉태하고 출발했 다(안천 지음, 『신흥무관학교』 중에서). 이 때 회원 은 ‘믿을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가 있는 사람’, ‘단 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에 한해서 자격이 인정되 었다. 특히 회원의 입회절차는 대단히 엄격했으며, 누가 회원인지 비밀에 붙여졌다. 이 때, 양기탁이 총감독을, 이동녕이 총서기를 맡 았으며, 각도에 총감을 두어 회원을 관리하였다. 또, 산하단체로 청년학우회를 두었는데, 윤치호가 중앙위원장을, 최남 선이 중앙총무를 맡 았다. 신민회의 이러 한 조직은 국권회복 운동의 중심에 청년 들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민회는 국 권회복을 위하여 전국 설립 초기의 배재학당 1910년 경 이화학당 교사 양기탁(1871~1938) ‘105인사건’으로 경찰에 끌려가는 신민회 요인들(1911년)(한국 학 중앙연구원 제공)